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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눈/빌 켈러]러시아 중산층의 분노

입력 | 2012-01-03 03:00:00


빌 켈러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소련이 저물어가던 1990년 초, 나는 모스크바 강변에서 러시아의 미래를 떠올렸다. 러시아는 진정한 의미의 중산층을 길러낼 수 있을까. 여기서 중산층은 특권층이 아닌 개인적 노력으로 중산층이 된 사람을 뜻한다.

당시 강을 따라 지어진 아파트는 청년 주거지구인 ‘아톰(Atom)’이었다. 청년공산주의자동맹(YCL)이 주택난 해결을 위해 이 사업을 시작했다. 주로 원자력연구소의 과학자들과 우주왕복선 제조 공장의 엔지니어들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이들은 아파트를 짓기 위해 수개월간 본업을 떠나 콘크리트를 붓고 집 벽을 쌓았다. 밀집한 아파트에서 부모에게 얹혀사느니 독립적인 커뮤니티를 만들자는 것이 이 사업의 취지였다.

소련이 붕괴한 1991년, 여러 가족이 이 지역으로 이사를 왔다. 곧이어 이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일을 그만두고 민간 기업에 취직했다. 이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똑똑하고 이상주의자인 엔지니어 이고리였다. 신흥 자본가들이 청바지, 컴퓨터, 록 앨범 등을 수입하는 일에 눈을 돌릴 때, 이고리의 계획은 남달랐다. 신흥 부자들이 민간 은행을 미덥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를 틈타 그는 품질 좋은 금고를 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0년 초, 국가안보위원회(KGB) 대령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은 인기 있는 대통령이 됐다. 푸틴은 국민에게 부를 가져다줬다. 그 대가는 참을 만했다. ‘입을 다물어라. 그러면 부를 얻으리라.’

당시 아톰 지역에는 선탠용 의자와 헬스 기구를 갖춘 새 헬스클럽이 들어섰다. 아톰 거주자 몇몇은 캐나다, 이스라엘 등지로 떠나기 시작했다. 이고리와 아내 타냐의 금고 회사는 번창했다. 그들은 아톰에 있는 집을 딸과 사위에게 넘기고 더 큰 아파트로 옮겼다. 이고리는 벤츠를 몰았지만 정신을 갉아먹는 소비주의와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꼈다.

그로부터 11년 후, 수만 명이 총선 결과에 항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모였다. 언론은 이를 ‘중산층의 반역’이라고 표현했다. 이고리와 타냐는 러시아를 포기하고 현재 영국 런던에 살고 있다. 올해 55세인 이고리는 사업체를 정리한 후 디자인 석사 학위에 도전하고 있다. 이고리는 정치와 정치인에게 관심이 없지만 인터넷으로 모스크바 시위를 지켜보며 기뻐했다고 한다. 군중 속에는 과거 전제주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20년 전 소련 붕괴 당시의 열망을 되찾아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도 있었다. 이고리는 군중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러시아 언론은 그들을 ‘새로운 성난 대중’이라 지칭했다. 성공한 젊은 도시인으로 정의되는 이들은 넓은 세상을 경험할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었고, 옛 소련을 그리워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이번 시위를 통해 러시아가 중산층을 길러냈다는 사실은 증명됐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민주주의가 이뤄지기에는 충분치 않다. 시위대를 미국의 도구라고 폄하한 푸틴 총리는 시위의 상징인 하얀 리본을 “콘돔을 닮았다”며 비아냥댔다. 여전히 푸틴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대중과 교감하는 야당 지도자의 부재 속에 푸틴이 다음 대선에서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큰 상태다.

그럼에도 나는 이고리의 딸 마리야와 카샤처럼 푸틴 시대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둠의 터널을 비출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촌에서 움트고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는 한 가지 교훈을 남겼다. 민주주의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 러시아인에게 내재된 구체제의 습성을 버리는 것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빌 켈러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