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어떤 일에도 간여하지 않는다’
그 전까지 성철 스님은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를 8년 동안 했다. 암자 주변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외부인의 접근을 막은 뒤 잠을 잘 때도 눕지 않는 수행이었다. 그는 1964년 바깥세상으로 나와 서울 도선사에서 청담 스님(1902∼1971)과 조우한다. 청담 스님은 위기에 놓인 한국 불교를 중흥시킨 주역이다. 광복 직후 국내 불교 신도는 50만 명에 불과했고, 불교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청담 스님은 불교 정화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국내 종교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개신교 장로인 대통령이 취임한 뒤 정부 정책이 특정 종교에 편향됐다는 시비가 벌어지고, 전에 볼 수 없던 종교 간 갈등이 불거졌다. 사회 세력들이 서로 극한 대립을 하면서 종교의 정치 개입 논란도 증폭됐다. 총선과 대통령선거가 치러질 새해에는 종교계가 또 한 번 정치적인 회오리에 휘말릴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개신교계는 지난해 말 서울시의회를 통과한 서울학생인권조례를 놓고 불교계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초중고교생의 집회 자유 보장, 두발 복장 자유화 등을 담고 있어 시행될 경우 학교 교육의 근간이 바뀌게 된다. 이른바 진보 세력은 서울 시민 9만7000여 명의 서명을 얻어 주민 발의 형식으로 조례안을 서울시의회에 올렸다. 주민 발의가 이뤄지려면 서울시 유권자의 1%인 8만20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부 불교 단체가 나서 적극적인 서명운동을 벌여 주민 발의를 성사시켰다고 개신교계는 보고 있다. 이 단체들은 조례 가운데 ‘특정 종교 및 종교과목 강요 금지’ 조항을 지지했다.
종교계 ‘선거 중립 선언’ 왜 못하나
개신교계의 한 인사는 “종교계가 설립한 사립학교 가운데 개신교가 세운 사학이 80%를 차지한다”면서 “일부 불교 단체가 개신교 사학에 제동을 걸려는 의도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개신교계는 조례 제정에 반대하는 ‘맞불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어 갈등의 불씨는 현재 진행형이다. 대표적인 두 종교가 정치와 이념 갈등에 휘말린 형국이다.
개신교계 일부는 아예 정치세력으로 변신했다. 기독교정당인 한국기독당과 기독자유민주당이 올해 선거를 겨냥해 출범했다. 실제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얼마나 얻어 낼지 알 수 없지만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해온 한국 사회에서 특정 종교가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하겠다며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방식은 거부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본격적인 선거 국면으로 접어들면 목사 스님 신부 등 성직자들이 설교나 설법 중에 특정 후보를 거론하고 지지를 호소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한국 종교의 위상과 신뢰도를 더 추락시킬 것이다.
성철 스님은 섣부른 사회 참여보다는 불교의 본질적 역할에 먼저 충실해야 한다는 뜻에서 서원문을 썼다. 성철 스님의 제자인 원택 스님은 “종교가 스스로 영향력을 갖춰야지, 현실에 들어가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성철 스님의 생각이셨다”고 전한다. 마침 올해는 성철 스님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로 4월 6일 탄신을 전후해 여러 기념사업이 준비되고 있다. 각 종교를 초월해 성직자들이 그의 서원문을 되새겨 봤으면 싶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이 올해 양대 선거에서 중립을 지키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도 현실적 방안이 될 수 있겠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