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 편집국 부국장
영일만의 기적 일궈낸 ‘기업 영웅’
“주변 국가들은 다 경제가 좋은데 한국 경제만 활력을 잃어가고 있어. 침체에 빠진 경제를 생각하면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경제란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야 하는데 이제 국민소득 1만 달러 갓 넘었는데 드러누워 있을 때요?” 그는 포항 및 광양제철소 건설 일화를 소개하면서 국가 및 기업 리더의 비전과 열정, 책임감과 ‘중심 잡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추위 속의 ‘뻗치기’ 끝에 그를 인터뷰했던 김창원 기자(현 도쿄특파원)는 그젯밤 필자와의 통화에서 “연세도 많은 분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대한민국이 잘돼야 한다’는 애국심과 나라걱정이 넘쳐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라고 전했다.
박태준이 작고하고 영결식 날까지 닷새 동안 일반 시민을 포함해 각계 조문객 8만7000여 명이 서울 포항 광양 등 전국 9곳의 분향소를 찾았다. 우리 사회는 “세종대왕이 다시 와도 두 손을 들고 떠날지 모른다”라는 자조적 농담까지 나올 만큼 갈등과 반목이 심하다. 김수환 추기경, 성철 스님, 한경직 목사 등 극소수 원로를 빼면 이번만큼 범국민적 추모 열기가 뜨거웠던 적은 드물었다.
그에게 쏟아진 찬사 중에는 실제 이상으로 미화한 부분도 없진 않았다. 다수 국민이 존경하는 원로가 드문 우리나라에서 큰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만큼 그 정도는 이해할 수도 있다. ‘한국의 철강왕’ 박태준의 공적은 일부 과오를 덮고도 남을 만큼 크다.
그러나 영결식 당일 식장(式場)에 ‘고(故) 청암 박태준 전 국무총리 영결식’이라고 한 것은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군인 경제인 정치인 총리 등 다양한 경력을 지녔으니 잘못된 내용은 아니지만 뒷맛이 못내 개운치 않다. 누가 그렇게 결정했는지는 모르지만 박태준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자리라면 ‘국무총리’보다는 ‘한국 제철산업의 아버지’나 ‘한국의 철강왕’, 굳이 직책을 넣자면 ‘포스코 명예회장’이라고 하는 게 나았다. 총리라고 해야 더 큰 예우라고 생각한 발상에서 뿌리 깊은 관존민비(官尊民卑) 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영결식장의 관존민비 의식 유감
경제계 문화예술계 체육계 등 민간 분야보다 정치나 공직(公職)을 더 영예롭게 여기는 잘못된 풍토만 바꿔도 한국이 한 단계 더 성숙한 나라로 도약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자기 분야에서 헌신해 나름대로 인정받은 인사들이 속칭 ‘벼슬자리’로 옮겨가 추락하고 패가망신하는 모습을 수없이 봐왔으면서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 씁쓸하다. ‘박태준 영결식 풍경’이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권순활 편집국 부국장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