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둔 5월 단기 출가한 동자승들과 축구공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생전의 지관 스님. 송월주 스님은 불교계에서 소문난 ‘총장의 미소’를 떠올리며 지관 스님의 입적을 아쉬워했다. 동아일보DB
‘무상한 육신으로 연꽃을 사바에 피우고/허깨비 빈 몸으로 법신을 적멸에 드러내네/팔십년 전에는 그가 바로 나이더니/팔십년 후에는 내가 바로 그이로다.’
스님이 지난해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남긴 임종게(臨終偈)는 모습만 바뀔 뿐이지 정신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탈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수행과 공부를 위주로 사는 스님들은 흔히 바깥세계에 어둡기 마련이지만 지관 스님은 달랐다. 해인사 주지 시절에는 불교문화재가 민족 전체의 것이라는 뜻을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해인사에 성보박물관을 짓고 사찰을 정비해 크게 중창했다.
스님은 수행과 종단 운영 등 이사(理事)를 겸비했지만 삶의 대부분은 경학 연구와 제자 육성에 바쳤다. 뛰어난 강사로 스님들에게 경전공부를 시켜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종립학교인 동국대에서도 수천 명의 후학을 양성했다.
스님은 1989년 동국대 총장으로 재임할 때 재단 내의 회계와 입시 문제로 뜻하지 않은 곤경에 처했다. 검찰이 재단 이사장과 총장을 구속 수사하자 해인사 스님들이 시위를 벌이는 등 불교계가 크게 반발했다. 김태호 내무부 장관이 사태 수습을 논의하기 위해 영화사로 찾아왔고 나는 이들의 구속 해제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며칠 뒤 지관 스님이 석방됐다. 스님은 구속될 때도, 풀려날 때도 특유의 웃음을 잃지 않아 ‘총장의 미소’가 화제가 됐다. 불교백과사전인 가산불교대사림에 얽힌 스님과의 인연도 기억이 난다.
내가 총무원장으로 있던 1980년 스님이 상좌와 함께 찾아와 서울 경국사 주지로 다시 발령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님은 이미 삼보사찰의 하나인 해인사 주지를 지낸 데다 사사로운 부탁이 없는 분이어서 뜻밖이었다. 스님은 앞으로 경국사를 평생의 주석처로 삼아 학문 연구와 교육의 거점 도량으로 키우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나는 스님을 경국사 주지로 발령했고 이후 경국사는 가산불교대사림을 편찬하는 터전이 됐다. 5년 전부터 사전 편찬을 위한 지원을 하고 있는데 미력이나마 완성될 때까지 보탤 계획이다.
삶은 회자정리(會者定離)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니, 만나면 헤어지고 산 자는 죽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으면서 무상하고 허망하다. 총무원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자리 중 하나다. 스님은 그런 총무원장으로 있으면서도 일정이 없을 때에는 어김없이 오후 3시경 경국사로 돌아가 늦은 밤까지 사전 편찬에 몰두했다고 한다.
스님의 생애는 남아있는 중생에게 귀감이 됐다. 갈 바를 모르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바세계로 속히 환생해 다하지 못한 중생구제사업을 다시 하시기 바란다. 스님에게 짧은 추모 게송을 바친다.
‘가산지관대종사 각령전(伽山智冠大宗師 覺靈前)’
작야추성낙강산(昨夜樞星落江山·간밤에 큰 별이 강산에 떨어지니)
욕식종사회광처(欲識宗師廻光處·종사의 깨달음의 경지를 알고자 할진대)
춘풍개화추엽락(春風開花秋葉落·봄바람에 꽃이 피고 가을에 낙엽이 지는 소식이더라)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48>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새만금 간척사업과 4대강 개발 등 환경문제에 얽힌 사연을 얘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