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가 정강 정책에서 ‘보수(保守)’라는 용어를 삭제하려는 논의를 하고 있다. 비대위의 김종인 정강정책·총선공약 분과위원장은 “외국 어떤 정당의 정강 정책에도 ‘보수’가 들어간 예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영국 보수당은 170년 넘게 ‘보수’를 정강 정도가 아니라 당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는 보수가 문제가 아니라 ‘보수할 것을 제대로 보수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 법치로 압축되는 헌법적 가치를 지키는 것이 지금까지 한나라당이 견지한 보수의 참뜻 아닌가. 한나라당은 이것을 버리자는 것인가.
김 비대위원은 ‘문제는 리더다’라는 책에서 “우리는 보수와 진보라는 말 자체가 불필요한 포스트 이데올로기 시대를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보수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면 변종 공산주의 세습왕조체제인 북한과 대치하는 우리로서는 이 말을 더더구나 버려선 안 된다. 김 비대위원은 1980년 전두환 군부세력이 주도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과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해 민정당 창당 때 정강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그는 헌법을 총칼로 짓밟은 군사정권에 협력하고, 한때는 김대중 정권에 협력하느라 ‘진정한 보수’를 추구한 적이 없다.
한나라당은 창당 이래 당헌에서 ‘중산층이 두터워지는 사회’ ‘사회 양극화가 해소되는 사회’를 추구한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이 중도 성향 유권자를 끌어들이려 한다면 공약으로 외연(外延)을 확장하면 된다. 영국 보수당은 윈스턴 처칠 내각에서 중도로 움직일 때나 마거릿 대처 내각에서 중도를 버릴 때나 모두 공약(manifesto)을 통해 그렇게 했다. 한나라당이 보수란 표현을 처음부터 쓰지 않았다면 모르되 지금에 와서 그 표현을 삭제하는 것은 얄팍한 기회주의로 비치고, 보수층의 반발과 이탈만 부르기 쉽다. 이명박 정부가 ‘중도 실용’을 지향했지만 실패한 것은 광우병 사태 같은 국정의 고비마다 보수 지지층의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응원의 동력(動力)이 따르지 않았던 탓도 크다.
한나라당은 옛 민주당 노선을 쫓아가고, 민주통합당으로 신장개업한 옛 민주당은 옛 민주노동당의 노선을 쫓아가는 듯한 양상이다. 야권 전체의 중심이 급격히 좌로 기울고 있는 만큼 한나라당이 더욱 중심을 잡고 버텨줘야 우리 사회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다. 한나라당 비대위가 추구할 쇄신은 ‘보수와 결별한 중도’라는 마이너스 쇄신이 아니라 ‘중도를 포함한 보수’라는 플러스 쇄신이 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