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춤을 추라”시던 선생님의 음성 귓가에 생생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1961년 나는 진정한 무용가의 꿈을 간직한 채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진정한 생명과 자유가 살아 숨쉬는 인간의 춤을 추고 싶다’는 그레이엄 선생님의 예술관에 심취돼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우며 한국의 마사 그레이엄을 꿈꾸는 열정의 시기였다. 그레이엄 선생님의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은 마치 잘 훈련된 조직의 구성원처럼 선생님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움직였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서면 학생들은 동작을 멈추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선생님은 말하지 않고도 명령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눈빛에 모든 위엄을 간직한 채 학생들을 바라보며 리드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선생님과 학생은 서로 인사를 했다. 미국에서는 상당히 어색한 장면이지만 그레이엄무용학교에서는 깰 수 없는 전통으로 잘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결코 권위로 치장한 스승은 아니었다. 수업에 임하는 자세는 항상 엄격했지만 따스한 자비와 온화한 자애로움이 흘러넘쳤다.
그레이엄 선생님의 지칠 줄 모르는 창조정신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개척정신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땅으로 돌아가 거기에 새로운 현대무용을 뿌리내려 보겠다는 꿈에 용기를 심어주었다. “인간의 움직임이야말로 춤의 원천이며 정신이야말로 그 움직임으로 창조돼 사람들의 가슴속에 전달된다. 따라서 춤동작을 갈고 다듬는 춤꾼의 행위야말로 예술창작의 뿌리가 되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현대무용가에겐 필요하다.” 그레이엄 선생님이 그러했듯 나 역시 달구면 더 단단해지는 쇠처럼 자유로운 이 땅의 현대무용가로서 늘 푸른 신념을 지닌 채 스승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하려고 노력했다.
미국 현대무용을 이 땅에 도입한 지 50년이 되는 오늘의 한국 현대무용은 척박했던 그 옛날에 비해 놀랍도록 많은 발전과 성장을 이뤘다. 아직도 나는 마사 그레이엄 선생님의 테크닉이야말로 가장 과학적인 원리로 창조된 무용기법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테크닉을 통해 배출된 쟁쟁한 한국 현대무용가들의 활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선생님은 격렬한 비판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전설적으로 닦은 분이다. 선생님은 단지 무용가만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은 곧 삶이라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표본이 되고 있다. 그것은 불모지와 같았던 이 땅에 현대무용의 씨앗을 심고 가꾸며 각고의 시련을 견뎌온 나의 영원한 지표인 것이다. 선생님과의 운명적 만남이 없었더라면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네가 한국 현대무용가 육완순임을 잊지 마라.” 내게 하신 말씀이 생생하다. 우리가 만난 운명을 믿되 그 운명에 안주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육완순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