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호 주간동아팀장
은행의 이런 태도를 굳이 비난할 생각은 없다. 은행이 자선기관이 아닌 이상 중소기업과 가계에 돈을 퍼주라고 강요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감독 당국이야 거시적인 안목에서 지나친 대출금 회수를 자제하라고 하지만 해당 대출이 부실화하면 문책을 당할 게 뻔한데 은행원이라면 누가 모험을 하겠는가. 그렇다고 우리나라 은행의 ‘뒷북치기’까지 옹호할 생각은 없다. 리스크 관리 강화 방침만 해도 그렇다. 정작 중요한 평상시 리스크 관리는 제대로 하지 않다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 후에야 호들갑을 떨었던 게 우리나라 은행의 행태다. 그때마다 조금만 도와주면 살아날 기업도 냉혹하게 외면한다는 원망이 하늘을 찌른다. 비 오는데 우산까지 빼앗아버린다는 비난이다.
호황기에는 어땠는가. 너도나도 덩치 키우기 경쟁이라도 하듯 경쟁적으로 대출을 늘렸다. 한때 이런 움직임을 선도한 우리은행은 황영기 행장이 재임한 2004년 3월부터 2007년 3월까지 3년간 무려 90조 원가량의 자산이 증가했다. 당시 외환은행의 자산과 비슷한 규모였다. 한 은행을 인수합병한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컸다. 그때의 잠재 부실 때문에 우리은행은 깊은 내상을 입었고, 이를 처리하는 데 8조 원 가까운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했다.
이걸 보면 우리나라 은행은 산업자본과 비슷한 논리로 움직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업자본은 호황기에 공장을 완전 가동하지만, 불경기에는 조업 단축과 비용 절감 등을 통해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다. 은행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경기 정점에서는 대출을 대폭 확대해 거품을 더 키우게 된다. 이후 거품이 꺼지면 부실이 급증해 은행이 휘청거린다. 경기 침체기에는 서로 대출 회수에 나서 침체의 골을 더 깊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신용 리스크가 커져 은행에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온다.
결국 우리 금융산업이 발전하려면 선진 금융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칙’이지, 선진 금융 ‘기법’이 아니란 점이다. 한때는 선진 금융상품의 총아로 각광받던 부채담보부증권(CDO), 신용부도스와프(CDS) 등 파생상품이 금융위기 주범으로 지탄받는 상황을 보면 선진 금융 ‘기법’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 원칙이란 호황기에는 오히려 외형 경쟁을 자제하고 침체기에는 잔뜩 움츠러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침체기에도 따뜻한 ‘은행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복되는 금융시장의 이상 과열과 침체를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은행이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주기적인 금융 불안에 시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윤영호 주간동아팀장 yyoung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