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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인 스타] 박재홍, 할 말은 하고 시시비비 확실히 가리는 ‘깐깐맨’

입력 | 2012-01-10 07:00:00

선수협회장 박재홍(SK)은 “이런 포즈는 고등학교 때 이래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색해하는 것도 잠시, 밝은 미소로 비교적 길었던 사진촬영을 마쳤다. 문학|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beanjjuun


프로야구 선수협회 회장 박재홍
그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은퇴 기로에서  SK와 극적인 재계약
내 코가 석잔데…덜컥 선수협회장에
분명하지 않으면 못참는 성격 탓?

예전엔 야구가 너무 쉬웠다
내 마음대로 됐으니까

세월이 흘러 이젠 ,
조연이 내 몫인건 알지만…
300-300클럽이든, 선수협이든
똑부러져야 박재홍 이거든


2011년 12월29일 문학구장. SK 박재홍(38)과의 인터뷰는 당초 약속한 시간보다 40분 정도 늦게 이뤄졌다. 이날 오전에 SK 선수단 전원은 구장에 모였다. 자율훈련을 겸했지만 굳이 야구장에 집결한 이유는 선수협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선수협 신임 사무총장의 인선을 두고 생긴 갈등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중심에는 새롭게 선수협회장에 선출된 박재홍이 있었다. 박재홍은 소속팀 SK 선수들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를 만들었고, 선수단 회의는 아주 간단하게 끝났다. ‘SK 선수들은 박재홍 회장의 뜻을 지지한다’는 결론이 신속하게 도출됐다.

● “재홍이 형 같은 스타일이 지금 선수협에 필요하다”

박재홍을 기다리다 SK 선수들 몇몇의 의견을 청취해봤다. 당사자인 선수들, 특히 아래 연차에서 느끼는 선수협의 체감온도가 궁금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선수들은 선수협의 당면 사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이며 메스는 어디까지 들이대야 하는지, 어디까지는 덮어둬야 할지, 선수들은 그 나름의 고민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견고한 의견일치를 보는 지점도 있었는데 “현 시점에 박재홍이 선수협회장을 이끌게 된 것은 잘된 일”이라는 견해였다. 사실 처음 박재홍이 선수협회장이 됐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야구계의 반응은 ‘의외’라는 평가가 주류였다. “소속팀 SK에서 주장을 맡은 적조차 없는 박재홍의 리더십은 검증이 안 됐는데 복잡하고 민감한 선수협을 이끌 수 있겠는가”라는 의구심도 일었다.

그러나 SK 선수들의 반응은 단순히 ‘팔이 안으로 굽는’ 차원은 아닌 듯이 들렸다. 누구보다 박재홍을 잘 아는 그들이 바라본 -야구 스타 박재홍이 아니라- ‘인간 박재홍’은 요약하면 이렇다.

“박재홍은 확실하다. 그것이 야구가 됐든, 인간관계가 됐든, 돈 문제가 됐든 매사가 그렇다. 투명하고 분명하지 않으면 참질 못한다. 시시비비는 확실히 가린다. 할 말은 한다. 필요하다고 느끼면 요령 있게 자기주장을 펼 줄 안다.”

●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었다”

사실 박재홍의 선수협 회장 수락은 그 개인적으로도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하마터면 작년 겨울 SK의 유니폼을 벗기 일보직전 상황까지 몰렸기 때문이다. 2011시즌 74경기에서 타율 0.186, 30안타 1홈런 12타점. ‘리틀 쿠바’의 명성은 날개 없이 추락일로였다. 부상이 있었다곤 하나 포스트시즌에서는 엔트리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자 SK 구단은 “은퇴 후 지도자 연수 아니면 방출”이라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박재홍은 “은퇴 조건이 나쁘진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3∼4일을 고민한 끝에 SK와의 결별을 택했다.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원해서 맡은 자리는 아니지만…”

마침 관심 있는 팀이 몇몇 있었다. 규정상, 2차 드래프트까지는 SK와 동거해야 됐다. 그것이 끝나면 결별이었다. 그런데 2차 드래프트에서 LG가 SK 최동수를 낚아채갔다. 우타 요원이 부족해진 SK는 방향을 급선회, 박재홍에게 재계약을 제의했다. 박재홍은 흔쾌히 그 손을 잡았다. 연봉은 작년의 절반인 2억원으로 결정됐다.

따라서 이번 겨울은 와신상담의 시간이어야만 했다. 이 와중에 선수협회장이라는 감투를 덜컥 쓴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다시 받아준 SK 구단에도 달갑지 않은 방향일 뿐더러 무엇보다 명예회복을 노리는 그의 행로에 짐이 될 소지가 다분했다. 두뇌회전이 빠른 박재홍이기에 ‘다른 꼼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샀다.

박재홍은 이에 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자기가 선수협 회장이 된 과정을 보면 최소한 순수성은 입증될 것이라는 논점이었다.

박재홍이 취재진 앞에서 선수협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아직 단정하긴 이르지만 박재홍은 일단 의도대로 선수협을 끌고 나가고 있다는 평가다. 김종원기자 won@donga.com 트위터 @beanjjun



“처음에 선수협회장을 뽑는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SK에서 이호준 등 후배들이 ‘재홍 선배가 하면 어떻겠냐?’고 말을 꺼낸 것이 시초였다. 당연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 그런데 정말로 후보가 됐다. 선수협의 비리를 척결하는 데에는 형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다라는 명분이었다. 그래도 설마 내가 될까 했는데 2표차로 정말로 당선이 돼 버렸다. 고참선배가 돼 가지고 선출이 됐는데 ‘이럴 줄 몰랐습니다. 사퇴합니다. 이럴 수도 없지 않겠는가?”

● “야구가 너무 쉬웠던 시절이 있었다”

4년 전, 박재홍을 인터뷰했을 때,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의 강타자였던 배리 본즈에 비유한 적이 있다. 박재홍은 달갑지 않게 여길 수 있겠지만 ‘오만한’ 그리고 ‘천재’라는 두 가지 코드가 그에게는 내재돼 있었다. 그러나 4년 후 시련을 거치고, 또 선수협 회장이라는 타이틀이 걸리면서 그런 이미지도 탈색돼 갔다. “유해졌다”는 평판도 들린다. 세월은 박재홍조차 변하게 만드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재홍은 박재홍이다. 다만 선수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던 요소들을 나이를 먹어가면서 찾게 된 것이다. 즉, 박재홍은 원래 이런 사람인 것이다. 다만 예전에는 모든 내부적 역량을 야구에 집중하기 위해 나머지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꺼내 쓰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초등학교 때, 야구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이 길이 곧 내 길’이라는 신념 같은 것이 자연스레 생겼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나는 평생 이 일로 먹고 살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의 야구실력은 타고 났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들은 왜 나처럼 야구를 못하지’라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타고난 천재는 노력도 처절하게 했다. 야구가 세상 그 무엇보다 재미있었고 좋았다. 과정이 즐거우니 결과 역시 아마 국가대표부터 프로야구 스타까지 언제나 최고였고, 센세이션을 몰고 다녔다.

프로 입단 첫해인 1996년 신인이 30홈런-30도루를 달성했다. 1998년, 2000년 30-30클럽에 또 가입했다. 250홈런-250도루(2009년4월23일)를 넘어 이제 300홈런-300도루(295홈런-267도루)를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모든 역량을 야구에만 집중하다보니 언젠가부터 박재홍은 ‘야구 선수는 야구만 잘하면 된다’의 대표주자처럼 여겨졌다. 야구에 관해서 박재홍은 타협하지 않는 완벽주의적 성향을 갖는다. 이 경우 박재홍은 의도하든, 원치 않든 주위와 불화를 겪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야구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쪽이었다.

치열하게 야구에 열중한 덕분에 박재홍은 부와 명성을 얻었다. 데뷔 첫해 신인왕과 홈런-타점왕을 차지했고, 골든글러브를 4회 수상했다. 1998년 드림팀 1기 주축타자로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고, 올스타전 MVP(2002년)도 수상했다.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횟수만 3회에 이르는 대목은 박재홍의 근성을 간접 증명한다.

그러나 박재홍은 “이룬 것에 비해 덜 조명 받았다”는 서운한(?) 감정도 살짝 드러냈다. 과거에는 무심하려 했지만 이제는 적극적으로 해명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사연들도 많다.

● “이젠 주연보다 조연이 어울리는 나이”

광주일고∼연세대를 졸업하고, 아마팀 현대 피닉스로 갔다. 그 다음에 현대 유니콘스 창단에 맞춰서 프로에 입성했다. 고향팀 해태를 저버린 것이라 해서 당시에 말이 참 많았다. 광주에 경기를 가면 외야에서 온갖 욕은 다 먹었다. 한번은 깡통이 날아와 머리에 맞기도 했다. 당시 봉변을 당한 박재홍이 모자를 벗고 외야 관중석에 인사를 한 일화는 유명하다. 박재홍은 “건방지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야구가 너무 쉬웠다. 하루하루 야구장에 나가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내 마음대로 다 됐으니까”라고 돌이켰다. 굴곡은 있었지만 야구 때문에 즐겁지 않은 적은 없었다. 한계를 느낀 적도 없었다. 만약에라도 그런 느낌이 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각오다. 그러나 적어도 아직은 아니다. 다만 박재홍은 이제 자기가 어떤 위치에 서야 되는지를 알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항상 주인공이었지만 이제는 조연이 더 걸맞은 자리라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내면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이제 얼마가 남았든 박재홍이 현역 인생에 추구하는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팀 우승이다. 박재홍은 30년간 야구한 보람을 느낀 때를 개인 기록이나 타이틀 수상 때가 아니라 현대와 SK에서 우승했을 때라고 말했다. 그 기분을 한 번만 더 느껴보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는 회장으로서 선수협의 정상화다. 선배로서 재정비된 선수협의 틀은 만들어주고 나가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이라고 생각한다.

박재홍은 황금의 92학번의 주역이다. 박찬호의 한화 입단으로 92학번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박재홍은 “광주일고 때, 황금사자기 준결승에서 찬호(당시 공주고)가 나한테 홈런 2방을 맞았다”고 웃었다. 이제 2012년, 올드보이들은 이대호 추신수 정근우 김태균 등 82세대, 김광현 김현수 류현진 윤석민 등 88전후세대로 대표되는 한국야구의 영보이들과 한국야구의 황금시대를 준비한다.

● Who is Park Jae Hong?

▲생년월일 :
1973년 9월 7일
▲신체조건 : 176cm/85kg
▲출신교 : 서림초∼무등중∼광주일고∼연세대
▲프로경력 : 1996년 현대∼2003년 KIA∼2005년 SK
▲통산성적 : 타율 0.285, 1751경기 1706안타 295홈런 1063타점 267도루
▲수상경력
- 1996년 신인왕 홈런왕 타점왕
- 2000년 타점왕
- 골든글러브 4회 수상(1996∼98년, 2000년)
- 2005년 200홈런-200도루 달성, 2009년 250홈런-250도루 달성(프로 최초)

문학|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트위터@matsri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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