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왕비가 한건물에 거처했지만, 합궁은 길일을 골라 상궁이 정했다. 공식적으로는 1주일에 이틀 정도였지만 금슬이 좋을 경우나 그렇고 대부분은 가뭄에 콩 나듯이 합궁을 했다. 왕비와의 정략결혼 탓에 왕의 눈은 후궁들에게 쏠린 적이 많았다.
합궁일이 정해지면 상궁들이 침전에 금침을 두 벌 나란히 깔았다. 왕과 왕비가 침전에 들면 촛불을 끄고 물러 나왔지만, 옆방에서 귀를 곤두세우고 살폈다. 만에 하나 발생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왕은 무치(無恥)라고는 하나 민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은 대부분 총애하는 후궁의 처소로 자주 행차를 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밤을 보냈다.
여사는 황제가 여인과 침실에 들 때마다 대가 붉어 ‘동관’이라고 불린 붓으로 이를 기록했다. 특히 황제가 사정하는 시간을 정확하게 기록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은 잉태될 당시의 사주로 운명을 점쳤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가장 장수한 왕은 83세에 승하한 영조다. 왕들의 평균 수명인 43세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오래 살았으며, 재위기간도 반세기가 넘는다. 영조가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로 바른 식습관과 활발한 성생활을 꼽을 수 있는데, 조선 전기의 학자였던 홍유손의 장수법을 실천했다. 99세까지 장수한 홍유손은 76세에 결혼해 아들을 낳은 인물이다.
영조는 홍유손의 장수법을 좇아 소식을 하는 한편 식사시간을 반드시 지켰고, 잡곡밥과 같은 거친 식사를 즐겼다. 또한 60대 중반에 10대의 정순왕후를 맞아들여 말년까지 부부생활을 가졌다.
김재영 퍼스트비뇨기과 원장
김재영 퍼스트비뇨기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