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 ‘전력운영 베테랑’ 8명 자문역 채용
상황판 앞의 노병들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거래소 비상대책 상황실에서 김병식 전문원(왼쪽에서 다섯 번째)이 동료 전문원들과 함께 현직 후배에게 전력 송전선로 현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한파가 한창이던 5일 국가보안시설인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국전력거래소 동절기 전력수급 비상대책 상황실에서 굵은 뿔테안경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명우 전문원(63)이 대형 모니터를 가리키며 젊은 직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한 전문원은 지난해 12월 5일부터 옛 직장인 전력거래소로 출근하고 있다. 2007년 은퇴하기까지 40년간 해왔던 전력운영 업무의 자문역을 맡은 것이다.
전력거래소가 전문성 보완과 실버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올겨울 전력난 극복을 위해 은퇴한 ‘역전의 용사’ 8명을 다시 호출한 것이다. 이들과 함께 기상청 은퇴자 2명도 자신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를 얻었다.
○ ‘7 대 3의 법칙’
전력 운영은 ‘매뉴얼이 3이라면 운영자의 직관적 판단이 7’이라 할 정도로 오랜 경험이 중요하다. 지난해 9·15 순환정전 때에도 전력거래소 근무자들은 여름 피크가 지난 만큼 전력 수요를 예년 수준으로 전망했다. 매뉴얼에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사고조사를 맡은 전력 전문가들은 이상기온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직관, 경험, 전문성이 매뉴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37년간 전력 운영 업무를 맡았던 김 전문원은 “발전소 330여 개, 변전소 720여 개, 실시간으로 변하는 기온 등을 고려하면 교과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날은 1년에 단 하루도 없다”고 말했다.
돌발변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경험 많은 근무자들이 필요하지만 은퇴자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상황실에 근무하던 30명(5개 조)의 평균 근무기간은 5년 정도에 불과했다. 김 전문원은 “한전에서 분리된 뒤 전력거래소에 입사한 직원들은 발전소에서 일해 본 경험이 없어 현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전문성 부족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 데이터 사용 오류 지적도
장 전문원은 “기상청과 기준점을 통일시키면서 1도 차이로 발생하는 하루 20만∼30만 kW의 전력 수요 예측 오차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상 전문원들은 기존 전력 수요 예측 변수에서 빠졌던 체감온도도 직접 계산해 반영하는 등 전력거래소의 수요 예측 능력을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집단사고에 브레이크 역할 자처
10인의 전문원은 기존의 직급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 만큼 조직이 집단사고에 빠지거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때 과감히 나서기도 한다.
최근 전력거래소 측이 전문성 강화를 위해 상황실 근무자에게 관련 자격증을 따라고 요구하자 전문원들은 남호기 이사장에게 “자격증을 요구하려면 인센티브도 함께 제시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면서 후배들로부터 환영을 받기도 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