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마을’의 아이들에게 그녀의 공부방은 구원이었다
《 지난해 12월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20여 분 떨어진 톤도 파롤라 마을. 폭 1m 남짓한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판잣집 수만 채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김숙향 씨(53·여)가 나타나자 주민들은 집에서 뛰어나와 반가운 목소리로 그의 영어 이름인 ‘샤론’을 외쳤다. 김 씨는 만나는 주민마다 유창하게 필리핀 현지어인 타갈로그어로 일일이 안부를 물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의 하나인 톤도 안에 형성된 이 마을에는 판자나 양철판 몇 개를 아무렇게나 덧대 곧 무너질 것 같은 7∼13m²(약 2∼4평)의 좁은 집이 3만여 채나 있다. 골목 안에 있는 집에서 손을 뻗으면 앞집 문에 닿는다. 하루에도 수십 건씩 강력범죄가 발생해 봉사자 대부분이 활동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이 지역에서 김 씨는 12년째 일하고 있다. 마을 외곽에 세운 ‘톤도센터’에서 초등학생과 하이스쿨(중고교를 합친 개념) 학생을 대상으로 방과후 교실을 운영하고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는 등 헌신하고 있다. 》
○ 공부 포기하고 필리핀 땅 밟아
김숙향 씨(조끼를 입은 사람)가 지난해 12월 톤도 센터에서 열린 ‘학부모 교실’에 참석한 부모들과 함께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김 씨가 빈민촌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운영하는 이 센터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1주일에 한 번씩 학부모 교실을 열어 자녀 교육법, 일자리 구하는 법 등을 가르치고 있다. 기아대책 제공
우울증에 빠져 세상을 탓하던 시절 우연히 읽기 시작한 책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1800년대 영국에서 고아 수천 명을 거두어 교육시켰던 영국인 사회사업가 조지 뮬러에 관한 책이었다. 김 씨는 “어떤 이는 남의 불행을 어떻게 행복으로 바꿔 놓을지 고민하며 삶을 바쳤는데 나는 내 불행만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 어느 날 다가온 전(前) 사형수
34세, 뒤늦게 사랑이 찾아왔다.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오던 필리핀인 목사가 사랑을 고백했다. 김 씨는 거절했다. 그는 폭력조직 두목 출신에다 살인교사 혐의 등 전과 34범이었다. 교도소에 복역할 때는 교도관 살인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복역 중 과거를 반성하고 특별 사면된 뒤 종교에 귀의해 목사가 됐다지만 너무나 충격적인 과거였다.
게다가 김 씨는 독신으로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백이 이어지고 보육원 아이들과 아이처럼 순수하게 어울리며 묵묵히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에 반한 김 씨는 수백 번 고민한 끝에 1993년 그와 결혼했다.
아이 셋을 낳은 뒤 2000년부터는 빈민촌으로 집을 옮겼다. 학교가 끝나면 갈 곳이 없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판잣집 쪽방에 방치되는 빈민촌 아이들을 위해 살기로 한 것. 마을 외곽에 있는 건물 일부를 빌려 아이 100명을 교육시키고 밥을 먹이며 본격적인 교육봉사를 시작했다.
그런 그들에게 불행이 닥쳤다. 부부는 센터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마닐라 북부의 농장을 빌려 메추리 수만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2008년 남편은 메추리알을 거두러 가야 한다며 새벽부터 차를 타고 농장으로 달려가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 470명의 아이들과 함께한 행복
지인들에게 어렵게 돈을 빌려 티셔츠 공장을 하던 건물을 인수했다. 그곳에서 아이 470명을 가르치고 있다. 센터 초기 “당신이 뭔데 우리 아이를 오라 가라 하느냐”며 욕하던 부모들은 이제 센터에서 식사 제공 및 청소봉사를 하며 그를 돕고 있다. 빈민촌에서 자라 자존감이 없던 아이들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판잣집 구석에서 기름등을 켜고 공부하는 모습에 부모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센터 출신 중 일부는 필리핀 최고 명문대인 국립필리핀대(UP)에 진학하고 정부 장학생으로 뽑혀 한국 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등 빈민촌의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김 씨는 “센터에서 누군가가 밥 한 끼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 표정은 밝게 변한다”며 “단돈 3만 원으로 한 아이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쓰레기로 다져진 땅… 정부 “보기 싫다” 장벽 세워 ▼
■ ‘최악의 슬럼’ 파롤라 마을
빈민촌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가 쌓여 만들어진 ‘쓰레기 바닥’ 위에서 파롤라 마을 아이들이 어울려 놀고 있다. 마을 옆 파시그 강이 폭우로 범람하면 이 쓰레기 바닥은 물에 불어 온 동네를 ‘쓰레기 강’으로 만들어 버린다. 기아대책 제공
아이들은 톤도 인근 부촌에 사는 중국인들이 마을에 하청을 주는 마늘 까기를 하거나 벌레가 우글거리는 쓰레기 바닥에서 맨발로 뛰놀며 하루를 보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좁은 집은 대낮에도 암흑 상태여서 공부를 할 수 없다. 7∼13m²(약 2∼4평) 남짓한 집에 보통 한 가족 6, 7명이 거주하는 탓에 집에 들어가면 앉아 있기도 힘들다.
현재 이 마을 인구는 10만 명을 훌쩍 넘어선다. 많은 인구가 자물쇠조차 없는 판잣집, 양철판 집을 빽빽이 지어놓고 모여 사는 탓에 절도사건도 빈번하다. 필리핀 정부는 미관상 보기 좋지 않다며 외부에서 빈민촌이 보이지 않도록 장벽을 세워 가릴 뿐 사실상 마을을 방치하고 있다. 김숙향 씨는 “부모들은 살아가는 일이 막막해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동원해 돈을 벌거나 이들을 그냥 버려둔다”며 “아이들은 바깥세상이 어떤지 알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마을에 갇혀 빈곤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다”고 말했다.
마닐라=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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