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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프리즘/허승호]인플레정부는 상생정부가 아니다

입력 | 2012-01-11 20:00:00


허승호 논설위원

돈에도 값이 있다. 돈값은 어떻게 잴까? 잣대가 둘 있다. 첫째 실물과의 교환비율로, 둘째 외국돈과의 교환비율로 잰다. 전자가 물가라면 후자는 환율이다. 물가와 환율이 오르면 그 나라의 돈값이 떨어졌다는 뜻. 기자는 작년 7월 21일자 이 난 칼럼 ‘집요하게 잘못 가는 MB물가정책’을 통해 ‘개별품목 가격의 인상’이 아닌 ‘전방위적이며 지속적인 인플레’는 오직 한 가지 이유, 통화팽창 때문에 온다는 경제원리를 소개한 적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물가상승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돈을 많이 푼 후유증이다.

사회적 약자가 가장 큰 피해자

현대국가에서 인플레를 유발하는 핵심 목적은 경기 활성화이므로 인플레의 1차 수혜자는 기업이다. 인플레는 환율 상승을 동반하기 마련이므로 수출 기업은 고환율 효과를 덤으로 누린다. 기업이 잘되면 주주도 이익이다. 물건값이 오르므로 실물자산 보유자도 이익을 본다. 부동산, 설비 등 값비싼 실물은 기업과 부유층이 많이 가지고 있다.

정부도 ‘지폐 제작원가(거의 0이다)’와 ‘찍어낸 돈의 구매력’의 차이만큼 이문을 남긴다. 이를 ‘세뇨리지’라 한다. 정부가 인플레를 유발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도 조세저항 없이 재정을 확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돈값이 떨어지면 현금-예금-채권을 가진 사람이 직격탄을 맞는다. 통상 가계는 예금자이며 기업은 차입자다. 따라서 가계가 손해보고 기업은 또 한 번 이익을 본다. 인플레로 가장 고통 받는 것은 연금-이자에 의존해 생활하는 노년층이다. 소득이 없어 국가 등 누군가에게 돈을 타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임금노동자의 손해도 크다. 임금도 따라 오르긴 하지만 물가상승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작년에 근로자의 실질소득은 3.5% 감소했다.

경제 관료들은 “민생을 고려할 때 물가보다는 일자리가 우선”이라면서 팽창을 택하곤 한다. 단기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앞당겨 즐긴 성장은 훗날 침체를 더 깊게 하며, 억지로 눌러둔 물가는 반드시 튀어 오른다. 더 무서운 일도 있다. 돈을 찍어 만든 팽창이 지속되면 물가뿐 아니라 은행-가계-기업의 부실이 함께 부푼다. 이 거품이 꺼질 때 서민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 여러 번 겪은 일이다.

종합하자. 인플레는 단기 경기를 살리려는 목적으로 정부에 의해 유발되며 부를 역(逆)분배한다. 기업과 부유층이 주된 수혜자다. 손해는 사회적 약자가 본다. 이들은 인플레 상황에 대처해 자기 이익을 지키는 능력도 떨어진다.

이 정부는 2010년부터 공정사회를 얘기해 왔다. 동반성장, 상생도 부르짖고 있다. 양극화로 고통 받는 중소기업과 서민을 돌보겠다는 아름다운 취지다. 그러나 거시경제 운용을 지켜보면 ‘앞뒤가 안 맞다’는 생각도 자주 든다. 돈을 푸는 저금리-고환율 정책에 도무지 변화가 없는 것이다.

26개월 연속 마이너스 금리

기준금리에서 소비자물가를 뺀 실질금리는 2009년 11월부터 작년 12월까지 26개월 연속 마이너스금리다. 이 통계를 만들기 시작한 1999년 이후 최장 기록이다. 작년 물가가 4%로 당초 전망치(3.5%)나 목표치중심값(3%)을 훌쩍 넘긴 것이 불운해서, 또는 우연히 생긴 일 같은가? 쇠고기국장, 전월세차관보를 정하고 ‘설 민생안정 종합대책’을 내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유럽과 미국경제의 불확실성 때문에 저금리를 고수하는 당국의 고민도 이해한다. 하지만 본류에서는 인플레 요법을 계속 쓰면서 지류에선 사회적 약자를 챙기며 상생하겠다는 것은 밥상 빼앗고 구호식량 나눠주며 생색내는 일처럼 보인다. 인플레를 이렇게 다루는 정부를 공정-상생-서민친화 정부라 부르기는 힘들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