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송월주 스님이 깨달음의 사회화를 주제로 1996년 12월 서울 동국대에서 열린 한일 불교학술대회에 참석했다. 송월주 스님 제공
은사 금오 스님이 내게 준 화두는 ‘이뭐꼬’였다. 깨달음의 사회화는 이에 대한 나의 실천적 해답이다. 수행과 종단 개혁을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깨달음과 이를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원효 스님은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이라고 했다. 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널리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는 의미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는 지혜를 구현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이라는 말도 있다.
실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과정보다는 그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가르쳐 제도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유마경에 부처님과 보적의 대화가 있다.
“세존이시여, 보살의 정토를 이룰 행(行)에 관해 말씀해 주옵소서.”(보적)
“보적아, 중생의 국토가 바로 보살의 불국토이니라. 교화될 중생의 능력에 따라 보살은 불국토를 택하느니라. 불국토를 허공에다 지을 수 없듯이 중생을 완성시킬 튼튼한 곳에다 세워야 하느니라.”(부처님)
그러나 한국 불교는 그동안 귀일심원에 치우치고, 요익중생을 소홀히 했다. 상구보리에 치우쳐 하화중생을 가볍게 여겼다. 대승불교를 표방하면서도 대중의 삶을 위한 노력보다는 개인적 성불에 치중했다.
참선 위주의 간화선(看話禪)은 우리 불교의 빛나는 전통의 하나다. 그러나 출가한 지 60년에 가깝지만 참선이 쉽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사실 선을 수행하는 극히 일부 수행력 있는 엘리트만이 선의 이치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일반인이 선의 본질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최근 간화선뿐 아니라 염불, 간경 등 다양한 수행법을 수용하는 등 종단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현대에 들어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더욱 큰 의미를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종교는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종교 스스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종교는 사회 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종교의 구성원 역시 사회에 발을 담그고 있는 한 종교는 사회적인 문제에 어떤 모습으로든 함께하게 된다.
한때 불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가 사회에 군림하던 시절도 있었고 어떤 때는 순수라는 이름으로 사회문제를 외면하기도 했다. 사회와 함께한다는 것은 바로 중생들이 겪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나간다는 의미다.
한국 불교는 이제 산중 불교에서 벗어나 수행하면서 포교와 경전 공부를 하고, 포교 수행과 경전 공부를 하면서 얻은 확신과 지식을 다시 전하고, 중생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깨달음의 사회화는 이 땅에 살고 있는 국민들, 나아가 인류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보살행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고록 마지막인 <53>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