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글을 써봐’라며 불덩이를 던진 이병주 선생님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영화 대사를 번역해 화면에 담을 때 자막의 길이는 제약을 받습니다. 또닥또닥 쉴 새 없이 넘어가는 대사를 핵심 위주로 잘 주워 담아야 하니까요. 이 때문에 자막을 만들 땐 뜻을 압축해 가급적 간결하게 표현해야 하지요.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그게 힘들 때마다 제 머리엔 지진이 쩍쩍 나곤 한답니다. 그런데 세상에나, ‘나를 있게 한 그 사람’을 한 명으로 압축해야 한다니!
“Give me one good reason not to die.” 영화 ‘여인의 향기’ 속 대사입니다. 실명한 중령 프랭크가 생을 비관해 자살하려고 할 때 도우미 고등학생인 찰리가 제지하자 쏘아붙인 말입니다. “내가 죽지 않아야 할 타당한 이유를 하나 대 봐.” 그러자 찰리가 응수합니다. “이유를 두 개 댈게요. 아저씨는 제가 본 어느 누구보다 탱고를 잘 추거든요. 페라리 스포츠카도 잘 몰거든요.” 결국 극적인 갈등 끝에 프랭크는 자살을 포기합니다.
“좋아하는 걸 하세요(Do what you love).” 스티브 잡스가 창조와 혁신의 첫 번째 원칙으로 우리에게 건넨 이 충고처럼 ‘지금 하는 일이 좋아서 하는 일인가, 아닌가?’가 성공 여부를 가리는 잣대가 될 수 있다면 모름지기 저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할리우드 키드처럼 좋아하는 영화를 평생 즐기며 번역 삼매경에 빠질 수 있고, 번역 일을 하다 보면 틈틈이 밀려들곤 하는 갈증을 창작을 하며 풀 수 있으니 저는 분명 성공한 사람입니다. 무척 행운인 것은 이 모든 재미와 성공의 첫 시작이 영화 ‘스탠바이 미(Stand By Me)’를 만나고부터입니다.
‘나를 있게 한 또 한 사람’은 스티븐 킹입니다. 그의 소설 ‘시체(The Body)’가 원작인 영화가 ‘스탠바이 미’이며 그의 작품들이 지금의 저를 영글게 했기 때문입니다. 두 작품에서 불알친구들은 마을에서 실종된 소년의 시신을 찾으려고 모험을 떠나는데요. 처음 나가본 바깥세상에서 아이들은 그동안 숨겨왔던 가족의 아픈 사연을 털어놓으며 성큼 가까워집니다. 특히 대장 격인 크리스가 작가가 되는 게 꿈인 소심한 성격의 고디에게 해준 말은 곧 저를 위한 충고이기도 했습니다. “부모가 널 애물단지 취급한다고? 쳇, 그러라지. 넌 작가가 될 수 있어. 그건 신이 내려준 재능이거든. 그러니까 넌 그걸 잃으면 안 돼.” 훗날 고디는 작가가 됩니다.
글을 마치며 추억의 공책을 펼치듯 ‘시체’의 첫 문장을 꺼내봅니다. ‘The most important things are the hardest things to say(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연이 누구나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이병주의 문장도 꺼내봅니다. ‘사랑은, 사랑할 수 있는 용기이다.’ 그러고는 20여 년 전에 했던 저의 다짐도 꺼내봅니다. 그 다짐이 작가인 지금의 저를 단련시켰기에! “누구를 사랑하든, 무엇을 사랑하든, 그 모든 용기보다 으뜸인 것은 나 자신부터 존경하는 자세야.”
이미도 외화번역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