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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내 인생을 바꾼 그것]나와 연극, 나와 사람 이어준 고락의 동반자 술이여!

입력 | 2012-01-14 03:00:00

연극배우 이호재의 술




배우 이호재는 “술을 먹는 시간과 기회가 줄어들수록 정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옛날 술 먹을 때가 그리워진다”고 했다. 그의 연극인생이 시작된 명동예술극장 객석에 앉았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빈 소주병이 연못가를 따라 죽 늘어설 양이면 으레 뒤를 돌아봤다. 동랑 유치진(東朗 柳致眞·극작가·1905∼1974) 선생과 부인이 살던 사택(舍宅) 창문이 열리며 “야∼” 하는 소리가 들리게 마련이었다. “예∼” 하고 앉아 있던 후배가 달려가면 동랑 선생은 소주를 한 병 주셨다. 때로는 집에서 해놓은 밑반찬을 안주 삼으라며 내놓으셨다. 드라마센터(현 남산예술센터) 운영도 힘겨웠던 선생이라 제자들 술상까지 잘 봐줄 여유는 없었다. 허구한 날 강술을 마셔대는 제자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뿐이었을 선생이 하루는 말했다.

“호재, 내가 핫도그 장사라도 할까?”

지금도 그렇지만 1960년대 연극을 한다는 건 하루하루 가난과, 절망과의 한판 씨름이었다. 배우 이호재(71)에게 그 시간을 배겨 낼 힘을 준 것은 술이었다.

○ 술, 사람

술이 아니었다면 이호재의 삶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에게 술이 없었다면 무대 위의 삶 50년(2013년은 그가 연극을 시작한 지 50주년 되는 해다)은 없었을 터다. 버거운 삶의 무게에 그냥 주저앉아 버렸을지 모른다. “술이라는 매개체가 연극을 지속할 수 있는 용기도 주고,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도 했지요.”

그가 본격적으로 술을 마신 건 1962년 가을, 연극아카데미 1기생으로 입학하고부터였다. 한국 연극을 부흥하려는 일념으로 동랑 선생이 서울 남산에 만든 드라마센터 부설이었다. 하지만 친구 따라 입학시험 보고는 혼자 합격한 그에게 연극은 좀 먼 얘기였다. 그는 연극 공부는커녕 출석도 뒷전인 채 명동예술극장 부근에서 술만 마셔댔다. 그때 술로 만난 친구가 훗날 음향전문가로 이름을 떨치는 김벌래(71)였다. 술값이 떨어지면 김벌래의 모친이 하는, 이화여대 입구에 있던 막걸리집까지 걸어가서 또 마셨다.

동인 모임 비슷한 극단을 만들었던 김벌래가 어느 날 그에게 연극을 같이하자고 했다. “야, 나는 연극, 배운 적도 없어.” 그랬더니 김벌래가 대본을 하나 가져와서는 읽고 외우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1963년 9월 존 스타인벡 원작 ‘생쥐와 인간’의 레니 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호평이 쏟아졌다. 연극을 몇 편 더하고 나니 수업에 들어가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거의 1년 만에 드라마센터에 올라가니까 동랑 선생이 저를 보시곤 ‘여태까지 뭐 했느냐’고 그러셔요. 몇 번 수업을 들었더니 ‘너 재주 있으니 계속해라’ 그러시더군요.”

주머니가 언제나 비어 있던 당시 술은 그와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맺어주는 도구였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연습이나 이따금 열리던 공연이 끝나면 함께한 배우들과 선술집으로 내달렸다. 퇴근길, 길게 이어진 술자리를 즐기는 소시민들과 어깨를 부대끼면서 한잔 술을 털어 넣었다.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가 언제 울릴지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에 말도 아껴가며 마셨다. 그때 서로를 쳐다보던 동료들의 눈빛이라니…. ‘그래, 우리 오늘 고생 많았어. 잘했어.’

지금처럼 각 극단이 사무실을 갖고 있던 때도 아니었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은 술집밖에 없었다. “어디 가서 만나겠어요? 그 사람이 언제 어디를 지나갈지 지키고 앉아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술집이었다니까. 사람과 사람을 이어줄 수 있는 데가 거기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연극을 계속하지 못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 술, 이야기

1980년대 접어들자 술자리에서 이호재를 크게 좌절하게 했던 돈 문제가 조금씩 풀렸다. 당시 연극배우들의 TV 드라마 진출이 붐을 이뤘다. 당시만 해도 탤런트들은 각 방송사의 극회(劇會)에 소속돼 자기 방송국 드라마 말고는 출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극회 소속이 아닌 그는 KBS와 MBC 모두 출연이 가능했다. 돈이 지갑에 가득한 나날이었다.

방송국에서는 매회 출연료를 바우처(전표)로 지급했다. 돈이 가득한 지갑에 바우처를 눌러 담은 뒤 남은 건 여기저기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녔다. 하루는 바우처를 바꾸러 우체국에 갔는데 창구 직원이 그를 불러 세웠다. “돈 가져가세요.” 바우처만 넘겨주고는 돈을 받는 것도 잊은 채 그냥 돌아 나온 것이었다. 배역을 못 맡은 후배 탤런트들을 몰고 다니며 술을 넘치게 사줬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했고 그는 기고만장했다. 1984년이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1년 넘게 연극을 한 편도 못한 거야.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도대체 내가 뭐하고 있나’, ‘내가 할 일이 뭔가’ 생각이 들어요. 연극은 누가 하나. 나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고는 모든 방송 출연을 딱 끊었어요.”

방송국은 난리가 났다. 당시 그는 KBS 1TV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서 독립운동가 서재필 역을 맡고 있었다. 방송국 측은 서재필을 만주로 보내 버렸다. MBC 드라마에서 맡았던 정신과 의사 역 또한 미국 유학을 떠나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미움을 산 그는 한동안 방송국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했다.

“그런 결정을 맨정신으로 하면 미친놈이지. 술을 먹고 내린 결정이었겠죠. 술은 좌절할 때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용기가 너무 지나칠 때는 스스로를 조절하게도 하지요.”

때로는 소주 두 병에 꽁치통조림 두 개를 들고 혼자 산에 올라가기도 했다. 좁은 산골짜기에 자리를 펴고 앉아서 먹는데 생각이 그렇게 넓어질 수가 없었다. 생각을 다 하고 내려오면 후련해지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생각이 맞을 때도 있고, 혼자 머릿속에서 꺼낸 것들이라 틀릴 때도 있었다. 그럼 고치면 됐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막 이야기하고 싶고 이야기를 좀 듣고 싶었다. 차를 마셔도 이야기할 수 있는 그윽한 분위기는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그런 그윽한 분위기는, 우린 필요 없거든.” 술 마시고 기억도 못할 이야기를 왜 그렇게 하고 싶은 걸까? “정(情)이라는 건 그렇게 해서 쌓이는 거지.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 둘 일이 아니래도 사람과 사람은 이야기가 오고 가야지.” 술 마시며 싸우기도 하지 않는가? “그게 얼마나 좋아. 치고받고 싸우는 건 안 좋지만 말싸움을 할 수 있다는 게 사람이 살아있다는 거 아니오.”

○ 술, 만남

지난해 12월부터 이달 1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아마데우스’에서 이호재는 주인공 살리에리로 열연했다. 외워야 할 대사가 아주 많은 작품이었다. ‘괜한 노욕(老慾)을 부리는 거 아닌가’ 자책도 좀 했다. ‘70 노인이 저 많은 대사를 외울 수 없다’는 후배 배우와 ‘당연히 할 수 있다’던 그의 팬클럽 회원들이 내기를 하기도 했다. 결국 내기에서 진 후배는 공연 일정 도중에 그에게 술을 대접했다.

하지만 그는 대사를 외우는 연습 기간에는 금주(禁酒)다. 이번 공연에 앞서 대본의 한 막(幕)을 외우면 책거리 하듯 술을 마시긴 했지만, 절대 술을 마시고 무대에 서지 않았다. 50년 철칙이다. 예전엔

1년에 단 이틀을 빼고 매일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지금은 가당치도 않다. 통풍에 혈압도 높다. 술을 마셔도 소주를 맥주잔으로 2잔만 마시려고 노력한다. “술도 나이가 들어가니 마냥 좋지만은 않더라고요. 술 마시다 힘이 부치는데 더 앉아 있으면 주접스러운 거지. 그래서 요즘은 술자리, 가능하면 안 끼려고.” 물론, 잘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다.

어쨌든 그는 술을 마신다. 아니, 그가 인터뷰 내내 표현한 대로 술을 ‘먹는다’. 그는 말한다. “아무리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발달했다 해도 그게 사람을 직접 만나게 하지는 못하잖아요. 술은 만나게 해준다고.” 이호재는 술이 고프다. 사람이 고프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 이호재 씨는…


많은 사람들이 이름은 몰라도 얼굴을 보면 “아, 그 사람!” 하는 연극배우.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연극을 공식 전공한 1기생. 한국연극예술상과 동아연극상 등 각종 상을 받았다. TV와 영화에서도 분주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