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는 백일홍을 보며 희망을 얻는다고 했다. 5일 오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만난 그의 활짝 웃는 얼굴이 백일홍보다 밝았다. 웅진싱크빅 제공
부산 광안리 바다가 보이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5일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67)를 만났다. 한파가 몰아닥친 날이었지만 수녀원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봄볕처럼 따스했다. 이 수녀는 씩씩하고 명랑했으며 수시로 호호 웃었다. 단지 조금만 걸어도 숨을 급히 몰아쉬곤 했다. 그는 2008년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던 중 암이 발견돼 항암치료 중이다.
이 수녀와 만난 곳은 그가 인터뷰를 할 때 주로 쓰던 수녀원의 ‘언덕방(言德房)’이나 ‘해인글방’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물건들을 모아둔, 일종의 ‘이해인 기념관’ 같은 곳이었다. 그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를 기억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만든 곳인데 여기 볕이 좋아 요즘 자주 머문다”고 소개했다.
이해인 수녀를 생각하면 ‘꽃시’가 떠오를 정도로 그의 인생엔 오롯이 꽃물이 들어있다. 그가 꽃을 좋아하게 된 건 숨쉬기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어릴 적 납북된 아버지와의 마지막 추억이 함께 꽃밭을 가꾸던 거였어요.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도 항상 꽃잎을 붙여 편지를 보내셨죠. 여름엔 치자꽃, 가을엔 코스모스, 겨울엔 장미를 붙이셨어요. 저도 10여 년 전부터 독자들에게 사인할 때 항상 꽃 그림을 그려요. 꽃 한 송이가 믿음과 소망, 사랑과 행복을 말할 수 있거든요.”
그가 최근 재미있게 읽은 소설 ‘꽃으로 말해줘’(노블마인)도 꽃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점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했다. 사랑의 표현이 조심스러웠던 영국 빅토리아 왕조 시대에 꽃은 연인들의 연서이자 암호였다. 이성에게 꽃을 받으면 집으로 돌아와 꽃말의 뜻을 찾아보며 상대의 마음을 확인했다. 이 소설은 위탁시설에서 태어난 소녀 빅토리아가 꽃말을 배우면서 외로움을 극복하고 사랑을 받아들이며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얼마 전 중학교 때 친구였던 남자 아이, 지금은 할아버지가 된 그가 제게 편지를 보내왔어요. 당시 제가 책을 한 권 줬는데 그 안에 장미가 꽂혀 있었나 봐요. 꽃잎이 이해인이라는 ‘소녀’를 상징하는 것 같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더군요. 소년의 풋풋함이 느껴져 마음까지 발그레해졌죠. 그런데 어렸을 땐 사람들이 저보고 코스모스 같다고 했는데, 요즘은 국화가 떠오른대요. 전 여전히 코스모스이고 싶은데, 호호.”
요즘 그는 사람들이 보내온 크리스마스 편지나 카드에 답장을 쓰느라 바쁘다고 했다. 며칠 전엔 록 그룹 ‘부활’ 팬클럽 카페에 들어가 글을 남겼다. 그는 김태원 씨를 비롯해 부활 멤버들과 무척 친하다. 짬짬이 책을 보고 글을 쓰며 강의도 한다. 다음 달 초엔 시인 정호승 씨와 함께 시인학교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암에 걸린 사실을 알기 전과 달라진 것은 없다.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올라가 항암치료를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치료를 받을 때면 저 역시 너무 아파 기도마저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고통의 의미를 체험하면서 아픈 이들을 잘 이해하게 됐어요. 암센터에 가면 ‘아들이 암에 걸렸다’, ‘나도 수술했다’며 제게 ‘보고’하는 이들이 많아요. 전 웃으며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죠. 그들에게 더 진정성 있게 희망을 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부산=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 이해인 수녀의 추천 도서 ::
◇꽃으로 말해줘/버네사 디펜보 지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가지/김태정 지음
사계절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피는 우리 꽃 100가지를 골라 생생한 컬러 화보와 함께 소개한 우리 꽃 백과. 꽃의 생태와 쓰임새, 갖가지 꽃에 얽힌 사연을 자세하게 풀어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