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이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에게 보내는 글
대구에서 어린 중학생이 동급생들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아이의 유서를 읽으며, 가해자 아이들의 어두운 가학 심리와 선악에 대한 무감각에 새삼 전율을 느꼈다. 아이는 가해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맞고, 노예와 같이 부림을 당하고, 돈과 물건을 빼앗겼다. 보복이 두려웠던 아이는 이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도 못한 채 막다른 길목으로 내몰리자 자살이라는 선택을 했다. 대전에서도 한 여고생이 집단 괴롭힘을 호소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고민하다가 자살을 하고, 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다른 여고생이 자살했다고 한다. ‘왕따’나 집단 괴롭힘이 우리 학교에 퍼져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과연 이 정도로 심각한지는 몰랐다.
가해자들은 무시로 때리고 물건을 뺏고 괴롭히는 일이 장난이라고 했지만, 피해자들에겐 그것이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이요, 인격에 가해진 수모라는 이름의 폭력이었다. 우리는 ‘왕따’나 집단 괴롭힘에 노출된 아이가 얼마나 큰 두려움과 압박감과 치욕감에 시달렸는지를 다 알지 못한다. 그 아이들이 느꼈을 고통에, 제 행위가 왜 그릇된 일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가해자들의 모습을 겹쳐 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어쩌다가 폭력에 물든 괴물이 되었는지를 곰곰 생각해보게 되었다. 폭력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게 예사롭고, 인간을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우리 사회에 퍼진 병리 현상에 자신도 모르게 감염된 어른들의 그릇된 말과 행동이 아이들에게도 옮겨져 그들을 사악한 괴물로 만든 것은 아닌지, 아울러 학교폭력과 ‘왕따’ 현상의 배경으로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그만이라는 목적지향주의, 혹은 학벌중심주의에 매몰되어 인성교육 일체가 사라진 삭막한 교육 현장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물론 학교에서 ‘일진’이나 ‘왕따’, 혹은 욕설, 폭력, 일체의 괴롭힘은 어떤 이유로도 용인되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관행이 되어버린 측면도 있어서 하루아침에 사라질 일은 아닌 것 같다. 여전히 괴롭히는 아이들과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이 이것들을 결코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를 해야 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더는 집단 괴롭힘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아이들이 나와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타락한 방식으로 영위되는 타락한 사회가 존재하는 한 아이들은 여전히 그 타락을 답습하고 반복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명하지 않은가? 사회가 먼저 모든 형태의 폭력을 추문으로 만들고 추방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런 사회 자정 노력 없이 아이들만 일방적으로 교화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 아이들이 죽을 만큼 힘들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고통의 회피 수단으로 자살이 선택된다는 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아이들은 자살이 자기를 향한 또 다른 폭력이라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교폭력이나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는 어린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꼭 해주자. 무엇보다도 괴롭힘을 당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선 나를 괴롭히는 자들에게 단호하게 ‘안 돼!’라고 하자. 폭력의 부당함을 그대로 용인해서는 안 된다. 내 힘으로 안 된다면 주변에서 힘을 보태줄 사람을 찾아보자. 부모님도 있고, 친구도 있고, 선생님도 있을 것이다. 힘들 때는 주저하지 말고 힘들다고 말하라. 집단 괴롭힘에서 내가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은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미처 모르기 때문이다. 아울러 죽음은 삶만큼 아름답지도 않을뿐더러 삶만큼 극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닫자. 죽음은 아무것도 없음, 텅 빔, 공허 그 자체다. 반면에 삶은 고귀한 선물이고, 아직 미래는 잠재성과 기회들로 빛나는 시간이면서 겪지 않은 야생이며 돌연한 기쁨이라는 사실 말이다. “과일의 씨앗도 햇빛을 쐬려면 부서져야만 한다.”(칼릴 지브란) 그러니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더라도 빛나는 미래라는 햇빛을 쐬기 위해서라도 꿋꿋하게 살아보자.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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