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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권지예의 그림 읽기]고스톱에서 인생을 배우다

입력 | 2012-01-21 03:00:00


 다섯 장 동양화, 조영남. 화가 제공

“뻑!” “따닥!” “쪽!” “폭탄!”

희붐한 신새벽,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와 함께 여인네들의 입에서 기괴한 고함이 터져 나옵니다. 20여 년 전에 새댁인 저의 설날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곤 했습니다. 설 전날, 각지에 솔가한 아들 4형제가 시골 시댁으로 모입니다. 며느리들은 두부도 만들고 떡과 만두도 빚고 온갖 차례음식을 손수 만드느라 밤늦도록 바닥에 엉덩이 붙일 틈도 없습니다. 겨우 한밤중에 일을 마치지만 새벽에 못 일어날 것을 염려해 큰며느리의 제안으로 밤을 새워 고스톱을 치기로 합니다. 저는 졸음으로 눈이 감기지만 막내며느리인 주제에 말석에서 광이라도 팔아야 하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웬걸요. 몇 판만 지나면 인정사정없이 승부의 세계로 빨려들게 됩니다.

요즘엔 설날이나 명절이면 온 가족이 화투를 갖고 노는 집이 많습니다. 화투는 별명으로 ‘동양화’라 불릴 만큼 색감과 그림이 무척 화려하고 아름답죠. 우리나라 전통놀이는 아니지만 서민들의 명절놀이 중 하나로 언제부턴가 친근하게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한국적인 팝아트로 화투 그림을 주로 그리는 화가의 그림에 화투의 보석이라 할 수 있는 오광(五光)이 펼쳐져 있네요. 오광이면 고스톱에서는 15점이나 되지만, 저런 패가 들어왔다고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닌 게 고스톱의 매력이지요.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운과 이변과 경우의 수와 교훈이 녹아 있는 축약판이 고스톱 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네 인생의 전화위복, 새옹지마가 거기에 다 있습니다. 부자로 태어나도 망할 수 있고 무일푼으로 태어나도 알뜰살뜰 저축해서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손에 쥔 패를 보고 전략적으로 머리를 써야 하며 중대한 기로에서는 고냐 스톱이냐를 냉철하게 판단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부단히 베일에 가려진 신호등을 만나지 않습니까. 그때 계속 가야 할 때와 멈출 때를 현명하게 아는 자가 결국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하고 성공하게 됩니다. 고냐 스톱이냐. 그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고스톱이 또한 인생과 닮은 점은,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독박’도 쓰고 ‘쇼당’으로 고민도 하고 낙장불입(落張不入)이라는 섣부른 실수를 후회하면서 교훈을 얻기도 한다는 거지요.

고스톱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자신의 패에 맞게 분수에 맞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패가 안 들어왔을 때는 낙심하지 말고 부지런히 ‘피’를 모으면 피박이라도 면할 수 있습니다. ‘스리고’의 유혹에 빠져 고를 남발하다 망한 기억으로 신중한 판단을 하며 적당한 선에서 광을 팔아 타협을 할 수도 있겠지요. 모두 자신의 선택입니다.

이제는 시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시고 설날이면 우리집 아이들은 외가에서 세뱃돈을 밑천으로 3대가 어우러져 고스톱을 칩니다. 아이들도 1년에 한 번뿐인 고스톱판에 끼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저도 아이들이 인터넷게임을 하는 것보다는 어른들과 고스톱을 하면서 인생의 한 수를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인터넷이다 스마트폰이다 TV다 모두 한곳만을 바라보는 기계세상에서 떠나 이번 설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고스톱 몇판 치면 어떨까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살벌하지만 들뜬 식구들이 내지르는 이런 대화로 유쾌한 명절 기분을 내보는 건 어떨까요.

“아이고, 쌌다!” “아버님, 똥 드세요.”

“피박 썼네.” “어머나, 저 피 좀 봐!” “고! 못 먹어도 고!”

권지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