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나를 있게한 그 사람]엄홍길 산악인

입력 | 2012-01-27 03:00:00

에베레스트 14좌 완등…그분이 있어 가능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1988년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1995년까지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6개를 올랐다. 그러자 인생의 목표가 명확해졌다. 무모한 것처럼 보였지만 대외적으로 “14좌 완등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14좌 완등이 어디 쉬운가. 봉우리 한 개에 도전할 때마다 엄청난 준비가 필요했다. 대원을 모으고 훈련시키고 장비를 마련하는 등 모든 일에 돈이 들었다. 내가 그 일을 해낼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때 고인경 파고다교육그룹 회장(68)이 발 벗고 도와줬다. 고 회장은 당시 히말라야 등정 산악인의 모임인 ‘히말라얀 클럽’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선뜻 ‘엄홍길 14좌 완등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줬다. 이후 내 산악 인생에서 고 회장과는 핏줄보다 질긴 인연의 끈이 만들어졌다. 희로애락을 모두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 회장 역시 산악인 출신이다. 내가 새로운 봉우리에 도전을 할 때마다 함께했다. 원정대 단장을 맡아 베이스캠프에 머물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998년 안나푸르나 원정 때다. 어떤 봉우리도 오르기가 쉽지 않지만 깎아지른 빙벽 그 자체인 안나푸르나는 히말라야의 대표적인 난벽(難壁)이었다. 이미 3번이나 도전에 실패한 터라 1998년의 도전은 4수째였다.

그런데 정상을 500m가량 남겨둔 해발 7600m 지점에서 큰 사고를 당했다. 함께 갔던 셰르파의 추락을 막느라 로프를 낚아챘는데 로프가 오른 발목에 감기면서 오히려 내가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발목이 돌아가 있었다. 뼈도 2군데나 부러졌다. 빙벽 한가운데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살기 위해선 밧줄에 의지해 4500m 지점에 있는 베이스캠프까지 돌아가야 했다. 베이스캠프에 있던 고 회장은 수시로 무전을 쳐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꼭 살아와야 한다”며 용기를 줬다. 엄청난 통증을 느꼈지만 참고 또 참았다. 안나푸르나의 신에게 “제발 살려 주세요.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다. 그렇게 다리를 질질 끌며 2박 3일을 기다시피 빙벽을 탔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베이스캠프에서 만난 고 회장은 나를 부둥켜안았다. 우리 둘은 한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고 회장은 네팔 국왕의 전용 헬기까지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그 덕분에 카트만두에서 응급 처치를 받은 뒤 곧바로 한국으로 이송됐다.

목숨은 건졌지만 다리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의사는 “다시는 빙벽을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사고가 난 뒤 5개월 만에 다리 상태는 약간 나아졌다. 그때 고 회장과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다.

고 회장은 그해 말 “미국 워싱턴 주에 있는 레이니어 산(해발 4392m)에 한번 가 보자”고 했다. 다리 상태도 점검해 보고 앞으로 고산 등반을 할 수 있을지 테스트를 해 보자는 거였다. 예전 같으면 쉽게 올랐을 그 산을 오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고 회장의 뒤를 따라가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고 회장은 그런 나를 보고 “넌 할 수 있어”라며 또 눈물을 흘렸다.

14좌 완등에 대한 나의 집념과 고 회장의 정성 때문이었을까. 발목에 철심 2개를 박은 상태였지만 다시 산에 오를 자신감이 생겼다. 1999년 봄 다시 원정대를 꾸렸다. 그리고 안나푸르나에 다시 도전했다. ‘풍요의 여신’은 마침내 내게 품을 열어 줬다. 그렇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내가 정상에 오른 다음 몇 시간 뒤 정상을 밟은 지현옥이 하산을 하다 셰르파 한 명과 함께 실종됐다. 한국 여성 산악인 가운데 처음 에베레스트에 오른 후배 지현옥을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야 했다.

고 회장은 이후에도 내가 가는 곳이면 언제나 함께했다. 2000년 K2 정상을 밟아 14좌 완등에 성공했을 때도 원정대 단장으로 현장에서 기쁨을 함께했다. 2004년 8000m 이상 위성봉인 얄룽캉과 2007년 로체샤르까지 올라 세계 최초로 16좌(14좌+위성봉 2개)에 올랐을 때 나보다 더 기뻐해준 분도 고 회장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산악인 엄홍길도 없었을 것이다.

엄홍길 산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