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이정웅. 화가 제공
글을 쓰려면 문방사우가 갖춰진 작은 서안에 정좌해야겠지요. 연적의 맑은 물을 벼루에 붓고 시간을 들여 먹을 정성껏 갈아야 할 테고요. 문진으로 누른 화선지에 먹을 묻힌 붓으로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라앉혀 한 점을 찍겠지요. 이토록 글을 쓰기 위해서는 예를 갖춰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어 한 획을 긋기 시작하겠지요. 너무 성급하거나 너무 머뭇거려도 고르지 못한 붓질이 획 하나에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붓을 쥔 사람들은 일필휘지의 경지를 꿈꾸겠지요.
이토록 붓을 쥐고 글 쓴 사람의 감정이나 성격이 드러나는, 사람냄새 나는 글을 우리는 이제 보지 못합니다. 눈물에 번진 잉크 자국이 군데군데 섞인 연서도 우리시대의 마지막 유물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대신에 손가락 한두 개로 몇 초면 140자를 후딱 쳐서 사람의 감정을 나타내는 몇 가지 이모티콘을 양념처럼 뿌려 초고속으로 전송하는 ‘패스트 레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새가 지저귀듯 온갖 즉흥적인 말이 난무하는 트위터나 SNS의 말의 홍수 속에서 왠지 심혈을 기울여 한 획을 긋는 붓질의 우직함과 여유가 그립습니다.
이 그림은 사진이 아닙니다. 붓에 먹을 묻혀 한지 위에 뿌리고, 붓이 던져진 붓 자국과 그 흔적을 유화물감으로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치밀하게 그려낸다고 합니다. 붓털 하나하나가 살아 있도록 극명하게 표현한 붓은 그야말로 붓 자국도 없이 잘 그려서 종종 사진으로 착각하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그림에서 붓이 갖고 있는 내재적인 힘과, 고요한 화폭에 붓이 뿜어내는 긴장된 생동감이 더욱 좋습니다. 내재된 에너지와 희망이 느껴지니까요.
아직은 일(一)월. 조용하나 힘차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한 획을 그어보고 싶어집니다.
권지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