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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 만난 사람/하태원]피터 벡 아시아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입력 | 2012-01-30 03:00:00

“北은 자국민 학살한 시리아 대신 미얀마의 민주화 모델로 가야”




25년 동안 6차례나 한국에 ‘장기 거주’한 명예 한국사람 피터 벡 아시아재단 한국사무소 대표는 고향에 돌아온 사람처럼 의욕이 넘쳤다. 민감한 표현도 능청스럽게 한국어로 말했다. 거구임에도 얼굴 표정이 풍부해 친근감을 준다.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2009년 2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청문회장. ‘미국 대북(對北) 정책 재정립’을 주제로 한 청문회 증인으로 나선 벽안(碧眼)의 신사가 유창하게 한국 속담을 말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직후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북핵 6자 회담은 공전상태였다. 키가 2m에 가까운 이 신사는 악화일로로 치닫는 북핵문제 해법을 ‘한국식’으로 훈수했다. 그는 “경험해 보니 알겠더라”며 “북한에 대해선 애초에 기대수준을 낮춰 잡는 게 좋다. 너무 큰 기대를 걸면 반드시 실망하기 때문”이라는 귀띔을 해줬다.

피터 벡 대표(45)는 1987년 5월 한국을 처음 찾은 뒤 5차례나 한국에 살았다. 그가 또다시 한국에 왔다. 이번에는 아시아재단의 한국사무소 대표자격이다. 3년 임기지만 연장이 가능해 장기 거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아시아재단은 아태지역의 평화와 번영, 개방증진을 목표로 하는 비영리·비정부 기구다. 한국 사무소는 1954년 만들어졌다. 수천 t의 신문용지와 서적용지를 지원해 한국 어린이들의 교재 제작을 지원했다. 서울대 10개년 개발계획을 후원하고 오늘날 외교안보연구원으로 바뀐 ‘외교연구원’ 개설의 산파(産婆) 역할을 한 것이 아시아재단이다. 아시아재단이 한국에 지원한 금액이 9300만 달러(약 1045억3000만 원)를 훌쩍 넘었다.

4일 도착해 ‘회오리바람(whirlwind)’ 같은 3주를 지냈다는 벡 대표를 26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아시아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캘리포니아 주 출신답게 늘 쾌활한 성격이다. 2006년 국제위기그룹(ICG) 서울사무소 대표를 마치고 미국에 돌아간 뒤 6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소감을 묻자 “23년 만에 꿈이 실현된 것”이라고 답했다. 1989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재학시절 샌프란시스코 아시아재단에서 인턴을 하면서 꿈꿨던 ‘드림 잡’을 갖게 됐다며 좋아했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2학년을 마치고 휴학 중이던 벡 대표는 1987년 배낭여행을 준비했다. 유나이티드항공 직원이었던 어머니 덕에 공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동남아시아는 좀 위험하니 동북아시아를 여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부모의 조언에 따라 중국을 거쳐 한국행(行)을 택했다. 달랑 ‘론리 플래닛(배낭여행 안내서)’ 한 권을 손에 쥐고 한국을 찾았던 벡 대표는 “한국이 지구상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일주일간 서울 광화문 근처 ‘대원여관’에 머물면서 민주화의 열기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이후 1988년 교환학생으로, 1989년에는 대학원생으로 한국에 머물렀고 1994∼1995년에는 정재문 신한국당 의원실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통역으로 활동했다. 벡 대표는 정 씨를 “양아버지”라고 불렀다.

―아시아재단 한국 대표로 어떤 활동을 펼칠 것인가.

“한국은 이미 개발국의 지위에 올랐고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탓에 사무소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일본지부가 철수했고 대만과 홍콩, 싱가포르도 모두 문을 닫았다. 서울사무소는 아시아의 개발국에 있는 유일한 아시아재단 지부다. 최근 아시아재단은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과 업무제휴를 맺고 한국의 효과적인 개발도상국 개발협력 사업시행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 정부기관 등과 손잡고 다른 국가들이 한국의 발전사례를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해나가겠다.”

―6년 만에 다시 보는 서울은 어떤 느낌인가.

“청계천이 인공적이기는 하지만 청계고가차도가 있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괄목상대(刮目相對)다. 북촌(北村) 특유의 문화가 살아 숨쉬는 인사동이 삼청동과 연결된 것도 매우 인상적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화의 거리에서 풍겨나는 진한 커피향, 그리고 한옥에 들어가서 맛볼 수 있는 막걸리의 향취는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한국정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극한 대치상황에서 등장하는 전기톱이나 최루탄도 실망스럽다고 했다. 벡 대표는 “영어로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어서 한국어로 말할 수밖에 없다”며 “정말 미안하지만 한국정치는 개판이다”라고 말했다.

아르바이트하던 영어학원에서 만난 한국 부인과의 사이에 열 살 난 딸 줄리아(한국명 애리)를 두고 있다. 벡 대표는 학기가 끝나는 6월까지 기러기 아빠 노릇을 해야 한다. 집은 종로구 옥인동에 얻었다. 스마트폰을 켜 2층짜리 단독주택을 보여주고는 “정말로 맘에 드는 집”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인왕산 자락에 집을 구한 이유는….

“강북이 훨씬 좋다. 마천루 숲에 미국식 음식이 넘쳐나는 강남보다는 강북이 애정이 간다. 더 한국 같다고나 할까. 산도 있고 고궁도 있고 역사도 있는 곳이다. 집사람은 서양식 ‘타운하우스’도 있고 외국인 학교도 가까운 판교나 분당을 선호했다. 하지만 난 미국식으로 살고 싶어 한국에 온 것이 아니지 않나.”

그는 익살스러운 표정과 과장된 목소리를 곁들였다.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을 한국 학교에 보낼 건가.

“딸은 영어를 잘하지만 한국어도 수준급이다. 집에서 엄마하고 한국말로 대화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사람인 아내를 설득하지 못했다. ‘왕따 문제가 심각해 잘못하면 아이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데 무책임하게 한국 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데 내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외국인 학교에 보내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교육현장이 병들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경쟁이 너무 심각할 정도로 치열하고 건강하지 못하다. 학생들이 사회성을 기르고 시민사회의 가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교사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지만 가정에서도 인성교육이 강화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1987년 버클리대로 돌아가 전공을 정치학에서 아시아학으로 바꾸고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벡 대표는 버클리대에서 교환교수로 한국현대사를 강의하던 고(故) 이영희 교수를 만난다. 이 교수를 통해 그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고은 시인 등 진보성향의 인사들과 교분을 나눴다. 그는 스스로를 ‘85학번’이자 ‘미국 386’이라고 부른다.

―진보적 인사들의 시국관에 동조하나.

“솔직히 그분들의 성향을 몰랐다. 난 리버럴한 미국인이다. 오바마보다 훨씬 더 리버럴하다. 하지만 난 한국 좌파와는 다르다. 한미관계나 북한 문제를 보는 시각은 한국 보수파에 훨씬 가깝다. 안보문제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천안함 폭침이 95∼98% 북한의 소행이라고 확신한다.”

2006년 서울을 떠난 뒤 벡 대표는 보수적 시민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 HRNK 사무총장도 했다. 그는 아시아재단 한국대표로 돌아오기까지의 기간을 “황야를 정처 없이 떠돈 ‘벡 삿갓’ 시기”라고 말한다. 미국 아메리칸대 교수, 스탠퍼드대 팬텍펠로, 일본 게이오대 방문연구원 등을 지냈지만 우리 기준으로 치면 모두 ‘비정규직’이었다는 것이다.

한국 문제를 주로 다루던 벡 대표의 관심은 2000년대 들어오면서 북한 문제로 옮아갔다. 1980년대에 독재를 이겨내고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룬 한국을 지켜봤으니 북한이 ‘같은 도전’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보고 싶어졌다. 아시아재단은 1996년부터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 인민대학습당, 평양과학기술대학 등에 책을 보내기 시작해 15만 권 이상을 지원했다. 농업, 도서관학, 영어교육, 통상법률 분야의 책이 주를 이뤘다. 벡 대표는 아시아재단 한국 대표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북한에 보낸 책들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북한 주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어떤 것이 있을지 살펴보는 기회로 삼겠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신년연설에서 ‘북’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여전히 북한 문제 해결에 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김정일이 급사(急死)하기 직전 북-미 간에는 영양지원과 관련한 작은 진전이 이뤄지려는 찰나였다. 다시 모멘텀을 잃는 것 아닌가 좀 걱정된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북한에 핵 폐기를 요구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물론 북한이 실제로 핵을 폐기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요구는 계속해야 한다. 어쩌면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동결시키고 핵 확산을 방지하는 것이 성취 가능한 목표일 수도 있다.”

―김정은의 3대 세습체제가 출범했는데….

“북한의 급작스러운 붕괴는 너무나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한미 양국은 김정은이 중심이 된 새 지도부에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자국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시리아 방식은 안 된다. 자발적인 민주화의 길을 걷는 미얀마 모델이 바람직하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재스민 혁명을 보면 북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벡 대표는 굉장한 우표 수집광이다. 그중에서도 한국 우표를 많이 수집했다. 1989년 미국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다가 한국 우표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 시작해 족히 10만 장에 이르는 우표를 모았다. 구한말(舊韓末) 우표에 특히 관심이 많다.

“다 아는 이야기겠지만 1884년 우정국이 설립되면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우편제도가 도입됐다. 1905년 일본에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길 때 한국에 392개의 우체국이 있었다. 각각의 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우표를 모두 찾아내는 것을 인생 소원으로 삼은 적도 있었다. 150곳 우체국 소인이 찍힌 우표를 모았다. 구한말 우표 경매에 가서 ‘파격적’인 가격을 적어낸 적도 많다. 집사람도 대충은 알지만 실제로 얼마 주고 샀는지는 모른다. 알면 화를 많이 낼 거다.(웃음) 정말 수억 원 갖다 바쳤지만 이제 그만뒀다. ‘벡 삿갓’ 유랑생활을 하다보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이른바 ‘한국 전문가’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는 하소연처럼 들렸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주최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한다고 하지만 미국 학계에서 한국학으로 교수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주요 싱크탱크나 미국 정계에서도 순수 한국전공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벡 대표는 인터뷰 말미에 “한국이 세계의 지도국으로 발돋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말했다. 25년 전 우연히 동방의 작은 나라를 여행한 뒤 운명처럼 한국과 사랑에 빠진 ‘키다리 아저씨’가 그려갈 한국 이야기의 다음 챕터가 궁금하다.

하태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