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삼성 투수코치 김태한
푸른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서 힘차게 볼을 던지던 좌완투수에서 지금은 제자들이 빛날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는 삼성 김태한 투수코치(오른쪽). 2010년 대구상고 동기인 양준혁(왼쪽)의 은퇴식에서 아쉬움에 눈물을 짓고 있다. 스포츠동아DB
삼성 김태한(43) 투수코치는 빼어난 왼손투수를 다수 배출한 대구·경북야구의 적통이다. 프로 1세대 권영호와 이선희, 그에게는 6년 선배인 성준 등 한 시절을 풍미한 위대한 좌완투수들의 계보를 이을 유망주로 삼성 입단 당시부터 화제의 중심에 섰다. 기대에 걸맞게 데뷔 초기 선발이든, 마무리든 맡겨만 주면 척척 제몫을 다 해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운. 그는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펼쳐보지도 못한 채 조용히 팬들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지도자로 변신한 지금, 그는 옛날 일들을 웃으면서 얘기한다. 자신의 손때가 묻은 후배투수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성장해가고 있고, 선수시절 목말랐던 한국시리즈 우승 갈증도 이제는 남의 일이 됐기 때문이다. ‘투수왕국’ 삼성 마운드의 특급조련사 김태한 투수코치의 가슴속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당시엔 귀했던 강속구 좌완투수
양준혁 제치고 신인드래프트 1순위 지명
펄펄 날았던 1993년 KS 준우승 아쉬움
선발-마무리 오가며 삼성 마운드 책임져
“고향팀서 은퇴 못했지만 코치는 내 숙명”
○‘좌완특급’ VS ‘괴물타자’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는 요즘엔 흔한 편이다. 그러나 좌완투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좌완 파이어볼러는 여전히 희소가치가 높다. 1991년 계명대 4학년 김태한은 희귀종이었다. 당시로서는 퍽이나 귀했던 강속구 좌완투수였다. 김 코치는 “대학 4학년 시즌 내내 시속 140km대 후반을 던졌다”고 회고한다.
○환희와 탄성이 교차한 1993년
한 몸에 모든 기대를 받고 입단한 첫해, 김태한의 성적은 어땠을까. 양준혁처럼 신인왕을 차지했을까. 1992년 그는 45경기에 등판해 3승7패5세이브, 방어율 5.42에 그쳤다. 그해 신인왕은 선동열급 슬라이더를 던진 롯데 고졸 루키 염종석(17승9패6세이브·방어율 2.33)의 몫이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성적표, 팀도 4위에 그친다. 김 코치는 “입단 직후 제주도로 동계훈련을 갔는데, 거기서 그만 어깨 부상을 입었다. 아마 때와는 다른 훈련량에 초반 무리하다 탈이 났다. 결국 미국 (베로비치) 캠프에도 못갔다”며 “훈련이 부족해서인지 (프로) 첫해에는 공은 빠른데 제구가 안돼 실패했다”고 밝혔다. 자존심에 금이 간 김태한은 그해 겨울 이를 악물었다. 그 성과는 이듬해 고스란히 반영됐다. “93년에는 준비를 잘해 개인성적도 좋았고, 팀도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죠. 선수시절을 돌아보면 가장 아쉬우면서도 기억에 남는 해입니다.” 스스로 절정기라 평가한 1993시즌. 팀 사정에 따라 선발과 마무리를 오간 그 시즌 14승6패2세이브, 방어율 2.83으로 180도 변신했다. 가장 찬란했던 시즌임에도 “가장 아쉬웠던” 이유는 해태와 맞붙은 한국시리즈의 기억 때문이다. 김 코치는 “당시 우리 멤버들이 참 좋았다. 마운드에는 김상엽과 박충식, 타선에는 양준혁, 동봉철 등 다들 젊고 실력 있는 선수들이 몰려 있어 재미도 있었다. 한국시리즈도 충분히 해볼 만했다”고 더듬었다.
실제로 한국시리즈에서 김태한은 1승1세이브, 방어율 1.38을 기록하며 삼성 투수 중 단연 돋보였다. “2차전에서 완봉승, 4차전에서 세이브를 거둔” 그의 활약으로 삼성은 4차전까지 2승1무1패로 앞섰다. 하지만 잠실로 옮겨 치러진 5차전부터 삼성은 내리 3번을 패했다. 삼성은 고대했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또 놓쳤고, 해태는 통산 7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1993년이 끝이었다. 그는 두 번 다시 한국시리즈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암흑기 삼성을 책임진 전천후 폭격기
선발과 마무리, 상반되는 보직이다. 과연 어느 쪽이 적성에 더 맞았을까. 그는 “아무래도 개인성적을 올리는 데는 선발이 낫다. 한번 던지고 며칠씩 쉬면서 몸조리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마무리도 해보니까 매력이 있었다. 특히 9회에는 우리 팀과 상대팀 덕아웃, 관중 모두가 나를 지켜봤다. 그런 상황에서 이기면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 야구장에서 긴장하면서도 승리를 지키기 위해 준비하는 게 보람 있었다”고 설명했다.
○연어처럼 돌아온 ‘삼성맨’
거기까지였다. 1997년을 끝으로 김태한은 종적을 감춘다. 정확히는 2000년 6월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의 선수생활은 2003년 SK에서 끝을 맺는다. 1998년부터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2000년 6월 22일 복귀했는데 자리가 다 정해져 있었어요. 용병들까지 들어와 있고…. 최고로 좋았을 때 군에 갔던 셈이에요.”
2000년 후반기 중간계투로 32경기에 나가 승패 없이 8홀드에 방어율 4.57, 또 한번 부상 악령에 시달린 2001년 고작 7경기에서 2.1이닝을 던지는 데 그친 그는 결국 신생팀 SK의 전력보강을 돕는 성격이 가미된 6대2 트레이드를 통해 SK 유니폼을 입었다. 그는 “(2001년 12월) 트레이드를 통보 받았을 때 서운하기보단 현실을 받아들였다. ‘팀의 필요에 따라서 이뤄진 것이니까 거기 가서 잘해야지’라고 생각했다. 대신 결국에는 삼성으로 돌아와서 야구를 마무리해야겠다는 욕심은 있었다”고 과거를 떠올렸다.
김태한 코치
▲생년월일=1969년 10월22일
▲출신교=대구초∼대구중∼대구상고∼계명대
▲키·몸무게=181cm·87kg(좌투좌타)
▲프로 경력=1992∼2001년 삼성, 2002∼2003년 SK, 2007년 삼성 코치
▲프로 통산 성적=318경기 44승46패55세이브 방어율 3.52
정재우 기자 jace@donga.com 트위터 @jace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