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농구 신인돌풍 오세근스물 다섯 그의 파란만장 농구스토리
안양 KGC인삼공사의 ‘샛별’ 오세근이 2012년 화려한 비상을 꿈꾸며, 홈코트 위에서 점프하고 있다. 길거리 농구 출신인 그는 보통의 선수들보다 늦은 중등부 3년때 정식으로 농구에 입문했지만, 각고의 노력과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프로농구의 ‘슈퍼 루키’가 됐다.안양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beanjjun
스타 기근에 시달리던 한국 프로농구에 샛별이 떴다. 김주성(동부) 이후 최고의 신인으로 꼽히는 오세근(25·안양KGC인삼공사)이 그 주인공. 그는 올스타브레이크 전까지 소속팀의 41경기에 모두 출전해 경기 당 평균 15.1점, 8.3리바운드, 1.2 블록슛을 기록하며 인삼공사 돌풍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 29일 올스타전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열린 1대1일 맞대결 승부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남다른 승부근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국 농구의 미래’ 오세근을 만나 그의 농구인생과 꿈에 대해 들었다.
초등학교때 볼링 애버리지 180점.
수영·스케이트 등 다른종목도 재능 뛰어났지만,
중3때 우연히 길거리 농구로 나의 길 찾게 돼.
○수영부터 볼링까지 능했던 체육 영재
오세근은 인천 영화초등학교 시절부터 스포츠라면 만능이었다. 수영과 스케이트를 배우기도 했고, 합기도와 검도에 능한 아버지 오도영 씨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태권도에도 관심을 가졌다. “수영은 계속 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수영 덕에 유연성도 좋아졌어요.”
볼링의 경우는 정식 선수로도 활약했다. 2010광저우아시안게임 남자볼링에서 3관왕에 오른 최복음(25·광양시청)이 그의 초등학교 시절 동료였다. 광저우아시안게임 여자볼링 4관왕 황선옥(24·평택시청)과도 친구 사이. “그 때는 제가 (최)복음이보다 조금 더 잘했던 것 같기는 한데…. 초등학교 때도 170∼180점은 쳤거든요. 대회 나가면 상도 좀 받았고요. 에이, 그래도 지금은 비교가 안 되죠.”
자연스럽게 농구공을 만지기 시작한 것도 초등학교 시절. 탁월한 운동신경에 키까지 또래보다 유달리 커서, 오세근에게는 적격인 운동이었다. “친구들이 축구하자고 운동장에 나갈 때면 저는 ‘난 농구할 거야’라고 농구골대 있는 쪽으로 향하곤 했지요.” 동인천중학교 진학 이후 인천지역의 길거리 농구에서는 서서히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3학년 때까지도 정식농구가 선수가 된다는 것은 먼 이야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중3 초였어요. 길거리 농구대회에 나가서 인천지역 준우승을 했거든요. 당시 안남중학교 민만기 코치님께서 저를 눈여겨보셨어요. 그 때 이미 키가 187cm였거든요. ‘한 번 해볼 생각 없느냐’는 권유를 듣고, 집에 말씀을 드렸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반에서 7등 내외를 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던 것도 영향이 있었다. “그 때 한참 진로 때문에 갈팡질팡하던 시기였어요. 공부도 아주 특출 나게 잘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학업으로 전망이 있다는 생각은 안했어요.”
뒤늦게 시작한 농구.
하지만, 뒤처지기 싫었다.
1년 유급도 부끄럽지 않았다.
○창피한 것보다 중요한 것이 농구, 유급 결심의 사연
종손인데다가, 조부모를 모두 모시고 있던 오세근의 가정은 엄격했다. ‘한번 안 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을 오세근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 달간 아버지를 쫓아다니며 조르고, 또 졸랐다. 결국 아버지가 아들을 불렀다. “너 정말 포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 오세근은 “꼭 성공하겠다”며 눈망울을 밝혔다. 수업을 마치면 농구를 배우기 위해 안남중학교로 향했다. 결국 전학까지 했지만, 남들보다 시작이 늦었기에 기본기에서는 많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코칭스태프는 유급을 권유했다.
○눈물을 거름삼아 다시 코트에 서다
인생에서 1년을 유예한 만큼, 한시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었다. “제가 길거리 농구 출신이다 보니, 폼이 좋을 수가 없었어요. 골밑슛, 언더슛, 드리블, 수비 자세부터 다시 배웠지요. 안 쓰던 근육을 많이 사용하다보니 몸이 아프고 힘들었어요.” 그 때문에 체력훈련에 신경을 쓰게 됐고, 웨이트트레이닝도 또래들보다 이른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했다. 제물포고 1학년 때부터 베스트5 자리를 꿰찬 그는 고2때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고비도 있었다. 고1때였다. “정말 열심히 하는데도 정체되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화장실 같은 곳에서 혼자서 많이 울기도 했어요.” 하지만 섣불리 “그만 두고 싶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어렵게 허락을 받았는지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눈물을 거름삼아 또 다시 코트 위에 섰다.
처음엔 반대한 아버지, 지금은 영원한 버팀목.
“포기하지 말아라” 그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내 농구인생의 영원한 버팀목, 아버지
중앙대 진학 이후 그의 명성은 이미 프로에까지 뻗쳤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성인대표팀에 발탁돼 태극마크를 달았고, 2010대학리그에서는 한국농구 사상 최초로 쿼드러플더블을 기록하기도 했다. 쿼드러플더블은 더블더블-트리플더블의 상위개념으로,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스틸·블록슛 중 4개 부문에서 두 자릿수 이상을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60여년이 넘는 NBA 역사 속에서도 쿼드러플더블은 단 4번만 나온 진기록이다. 2010년 9월 대학리그 상명대전에서 오세근은 14점·18리바운드·13어시스트·10블록슛을 올렸다. 대학시절 최고의 주가를 올렸지만, 그의 노력과 승부근성에는 변함이 없었다. 중앙대 시절 그의 은사인 김상준(삼성) 감독은 “항상 밤늦게까지 체육관의 불을 밝히며 개인훈련을 하던 선수가 (오)세근이었다”고 회상했다.
○우승하면 신인왕은 주시지 않을까요?
농구전문가들은 “오세근이 신인왕을 넘어 MVP급 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치켜세우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저는 모든 것이 부족해요. 현주엽 선배님의 센스와 드리블, 서장훈(LG) 선배님의 슛, (함)지훈(상무)이 형의 포스트업, (김)주성(동부)이 형한테는 모든 것을 배우고 싶어요.” 그래서 오세근은 대표팀에서 뛰는 것이 좋다.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규리그 2위인 KGC인삼공사는 1위 동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올시즌 상대전적은 1승4패. “동부라고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 플레이오프에서 우리가 못 이기라는 보장은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우승이 너무 하고 싶거든요.” 오세근에게 “신인왕과 MVP, 우승 중 단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것을 고르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우승이지요. MVP는 말 그대로 최고의 선수가 받는 것이잖아요. 제가 최고가 아닌데, 지금 받으면 좀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대신 우승을 한다면, 신인왕은 제게 주시지 않을까요? 하하.” 코트위에서의 플레이처럼 영리한 답변이 돌아왔다.
○이상형? ‘예의바르고, 어른 공경할 줄 아는 여성’
오세근은 올해 우리나이로 스물여섯이 됐다. 다소 이른 감은 있지만, 그의 결혼관은 어떨까. “결혼을 일찍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아직 여건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운동하기에도 바쁘고….” 종가에서 자라온 만큼 예의범절이 뼛속 깊이 배어 있는 그다. 1년이면 제사만 10차례 이상 지내다보니, 어른에 대한 감사와 공경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부모님 등 어르신들께 잘 하는 여성”은 그가 생각하는 신부감의 중요한 조건이다. “청순하고 귀여운 스타일을 좋아하지만, 외모는 그렇게 따지지 않아요. 느낌이 통하는 사람이 좋아요. 사실 제 키(200cm)가 크다보니, 예전에는 키 큰 여성분들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아요. 키 큰 분 만나고 싶다고 해서 꼭 바람대로 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하하.” 잠시 미소를 짓던 오세근은 “아, 그런데…. 숙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보니 누군가를 만날 시간도 없는 것 같다”며 웃었다.
안양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트위터@setupma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