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후 국내 재배… 대보름 부럼으로 인기
19세기 중엽 ‘동국세시기’에는 대보름날 아침에 날밤 호두 은행 잣 무 등을 깨문다고 했다. 땅콩 대신 엉뚱하게 무가 들어가 있다. 1931년 동아일보 기사에도 부럼 중에서 가장 많이 먹는 것은 잣이라고 했다. 반면 땅콩은 소비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1930년대 최남선이 집필한 ‘조선상식문답’에는 부럼으로 밤 호두 은행 잣 무 등을 깨물지만 근래에는 무 대신 땅콩인 낙화생을 많이 먹는다고 적었다. 요즘과 달리 예전에는 땅콩을 잘 먹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유는 땅콩이 우리나라에 늦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이 땅콩을 처음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여 년 전이다.
땅콩은 꽃이 땅에 떨어져 흙에 묻히면 그 속에서 열매를 맺는 특이한 과실이라고 했다. 낯선 이국땅에 간(肝)을 땅에다 묻으면 사람이 나오는 곳이 있고, 먼 사막에는 뼈를 묻으면 땅속에서 양(羊)이 나오는 곳도 있다고 하던데 꽃이 떨어지면 땅속에서 과실이 열리니 땅콩도 같은 이치인 것 같다며 신기해했다. 실제로 땅콩은 꽃이 수정된 뒤 씨방자루가 밑으로 길게 자라 땅속으로 들어간 뒤 땅속에서 열매를 맺는다.
이덕무뿐만이 아니었다. 역시 정조 때 중국을 다녀와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을 쓴 서유문도 중국에서 처음 땅콩을 먹고는 처음 본 과실에 대한 소회를 적었다. 과일 중에 무화과와 낙화생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화과는 꽃 없이 열매만 맺는 과일이고 낙화생은 꽃이 땅에 떨어져 스스로 열매가 된다고 했다.
이처럼 땅콩을 처음 본 조선의 선비들은 이를 이치에 맞지 않는 신기한 과실로 여겼다. 통상 식물은 지상의 줄기에서 열매를 맺는데 땅콩은 땅속에 묻힌 꽃에서 열매가 열린다고 하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땅콩의 한자 이름이 낙화생(落花生)인 것도 꽃이 떨어지면 땅에서 열매가 나온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땅콩을 재배한 것은 훨씬 늦었던 모양이다. 이덕무가 중국에서 땅콩 재배법을 자세히 물었다가 돌아올 때 땅콩 종자를 가져다 심었는데 썩어서 싹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한 세대 후의 인물인 추사 김정희도 ‘완당집(阮堂集)’에서 중국에서 땅콩을 가져온 사람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재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1836년에야 비로소 남모라는 사람이 집에 땅콩을 심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땅콩 재배가 본격화된 것은 20세기 초 이후로 보인다.
<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