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영원한 평화’ ★★★★
의인화한 세 마리의 훈련견을 통해 테러리즘의 시대에 자유주의 사회가 처한 윤리적 딜레마를 극화한 스페인 번역극 ‘영원한 평화’. 극단 코끼리만보 제공
1번 오딘. 2번 임마누엘. 3번 존존.
제목만 보고도 이를 맞힌다면 당신은 이 연극을 한껏 즐길 수 있다. 설사 모른다고 해도 이 연극을 즐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연극 속에 그 해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첫째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엔이 결성될 당시 그 이론적 토대가 되면서다. 둘째는 냉전체제가 끝난 뒤 소위 민주주의 국가들 간에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민주적 평화론’이 부각되면서다. 특히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독재국가의 민주화에 미군이 적극 개입하는 ‘테러와의 전쟁’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네오콘의 이론으로 각색되면서다. 둘 사이엔 지독한 역설이 성립한다. 영구 평화를 위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가 도출됐기 때문이다.
2009년 국내 초연된 ‘다윈의 거북이’라는 작품을 통해 거북이의 시선으로 서구 지식인들이 자행한 만행을 신랄하게 고발했던 스페인의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는 이번엔 개의 시선으로 이런 서양 근대 정치철학의 역설을 물고 늘어진다.
그것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이 테러리즘의 시대, 진정한 평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선 안 되는가.
여기까지 읽고 어려울 것이라고 지레 포기할 것 없다. 작품은 대테러전 특수견으로 최종 후보에 오른 3마리 개 중에서 어떤 개를 선발할 것인가라는 상황극을 통해 이 화두를 코믹하게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3마리의 개는 각종 철학으로 무장한 사색적인 임마누엘(이종무), 길거리의 생존 법칙으로 무장한 잡종견 오딘(정선철), 그리고 최고의 유전자를 지닌 개들만 교배한 엘리트 훈련견 존존(김종태)이다.
이들이 처한 마지막 테스트는 한국인들의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개그콘서트 ‘비상대책위원회’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급박한 테러를 앞두고 막연히 테러 용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비상대책위원회의 우유부단한 위원들과 달리 오딘과 존존은 행동을 택하려 하지만 임마누엘은 전전긍긍할 뿐이다.
만일 그 용의자가 아무 죄 없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야말로 테러리스트와 맞서 지키려는 ‘인간적 가치’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테러리스트와 등질(等質)의 인간이 되어버린다.
이 퀴즈에는 명쾌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테러리즘의 시대,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믿는 칸트의 후예를 자처하는 현대인들이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윤리적 딜레마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