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로 사라질 처지 서울 종로구 익선동 점집 골목… 무속인 정태자 씨의 한숨
재개발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서울 종로구 익선동 풍경. 지난달 31일 내린 눈이 개량한옥 지붕 위를 덮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무속인 정태자 씨(61·여)는 앞에 놓인 맥주잔에 소주 1병을 넘칠 듯 따르며 입을 열었다. 마주 앉은 식탁에 놓인 불판엔 그을려 바싹 마른 삼겹살과 김치 조각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오후 4시, 소주를 마시기엔 이른 시간. 하지만 그는 점집 문을 서둘러 닫고 한바탕 술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인간의 미래는 말이지, 원래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도 내 앞날을 모르는데 누가 누구의 미래를 봐줘.”
미간을 찌푸린 채 소주 한 모금 마시고, 담배 한 모금을 안주 삼아 깊게 빨아들였다. 19년 동안 수많은 세속인들의 ‘내일’을 점쳤던 무속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소주를 단숨에 넘겼다. 》
정 씨는 1980년 불현듯 무당이 됐다. 하루아침에 어린아이가 말문을 트듯 사람의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용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1992년. 익선동 요정을 찾는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요정 여종업원들을 상대로 한 점집이 우후죽순 생기던 때였다. 한창때는 점집이 20곳 가까이 들어섰다. 정 씨는 고개를 살짝 들어 허공을 응시하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때만 해도 익선동은 잘나갔어. 아무렴! 잘나갔지.”
○ 요정 여종업원들로 북적이던 점집
익선동 골목 구석구석엔 20∼30년 된 점집들이 숨은 듯 자리 잡고 있다.
“껄껄껄. 그래 내 집에는 늦지 않아야 되니 우선 들어가마. 그래도 나 없는 새 바람피우면 다음에 혼날 줄 알아.”
“호호, 서방님은 저를 어떻게 보고.”
1990대 초 명동이 낮의 거리였다면 익선동은 밤의 거리 중 으뜸이었다. 골목 곳곳이 불야성을 이루고 검은색 세단과 양복 입은 사내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불콰한 얼굴의 사내들이 걸을 때마다 양복에선 채 털지 못한 여자의 분내가 풀썩였다. 당시 익선동에는 서울시 등록 음식점 1호인 오진암을 비롯해 도원, 명월, 몽 등의 요정이 모여 있었고, 이런 요정마다 손님이 북적였다. 요정에서 일하는 여종업원 수만 500명이 넘었다.
익선동 골목에 자리 잡은 점집에는 요정 여종업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남자와 팔짱을 끼고 점집을 찾는 종업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혼자 점집을 찾았다. 용하다고 소문난 정 씨의 점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집은 고해실(告解室)이었다.
“보살님. 가끔은, 저도 사는 게 지겹답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계집이 왜 한숨을 쉬어, 복 나가게. 넌 팔자가 고와. 그러니 걱정 붙들어 매고 일만 해.”
익선동 무속인들은 낮이건 밤이건 여종원들과 마주 앉아 인생을 상담해주는 게 일이었다. 손님이 권한 술에 취해 자정이 넘어 점집을 찾는 이도 있었고, 낮에 요정이 문 열기 전에 들러 수다를 떨다 출근하는 이들도 있었다. 연령은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고, 정 씨의 입은 늘 걸었지만 여종업원들은 큰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
○ 서울 한가운데 섬처럼
양팔을 벌리면 닿을 듯한 좁은 골목으로 분홍 스타킹을 신은 꼬마와 하얀 강아지가 뛰논다. 낡은 자전거를 탄 노인은 조심스레 꼬마와 강아지를 피해 골목을 지나갔다. 좁은 골목으로 마주 본 지붕은 낮고 군데군데 구부러졌다. 붉은색이나 회색 벽돌로 만든 벽에는 도시가스관과 보일러 연통이 아무렇게나 꼬여 있다. 골목 끝에 위치한, 얇은 미닫이문이 달린 슈퍼마켓 앞에는 요즘 보기 드문 파란색 동전식 공중전화가 놓여 있다. 서울의 웬만한 주택가에서는 오래전 사라진 연탄가게와 기름가게도 눈에 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 6번 출구 오른쪽에 자리 잡은 익선동 초입에는 돼지고기 볶음과 순댓국을 파는 식당이 밀집해 있다. 이런 식당골목을 지나쳐 좀 더 들어가면 ‘서울답지 않은 서울’이 펼쳐진다.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여 대로변에선 보이지 않는, 이런 까닭에 근처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보면 섬처럼 느껴지는 곳이 익선동이다.
익선동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20년대부터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건축업자였던 정모 씨가 조선인을 위한 집을 짓겠다며 개량한옥을 지어 분양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가회동과 삼청동, 계동 등에 있는 한옥촌 역시 이때 생겨났다. 익선동은 근대적인 분양주택의 효시인 셈이다.
하지만 이후 익선동은 광속(光速)으로 변하는 서울을 따라가지 못했다. 서울의 모든 것이 변할 때 익선동은 20세기 초반의 모습 그대로 남았다. 익선동 밤거리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 대신 부랑자와 노동자들이 채웠다. 서울시 등록 음식점 1호였던 오진암은 2010년 헐렸고, 현재 그 자리엔 중저가 호텔을 짓기 위한 터 닦기 공사가 한창이다.
○ 사라질 ‘왕의 고향’
“아아, 뒤에 들리시죠? 이곳은 누동궁이라는 사당 터입니다. 조선 25대 왕인 철종이 아버지와 자신의 형을 모셨던 곳이죠.”
익선동에서 외국인 전용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한재호 씨(41)가 동네 구석구석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외국인들에게 구성진 목소리로 일장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모두 한 씨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일본인 관광객이다. “익선동은 예부터 무수리가 모여 살던 동네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식 주택이 지어진 곳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이곳은 조선시대 왕이 태어난 고향이죠.”
일본인 관광객들의 눈빛이 일순 초롱초롱해졌다. 한 씨가 관광객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철종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철종은 임금이 된 후 자신이 어릴 때 살았던 이곳에 아버지인 전계대원군의 사당, 즉 누동궁을 세웠죠. 자기 형인 영평군도 함께 모셨어요.”
한 씨의 설명이 끝나자 일본인 관광객들은 개별 관광을 위해 하나둘씩 골목을 빠져나갔다. 한 씨는 관광객 틈에 섞여 이야기를 듣던 기자를 따로 부르더니 허름한 주택 앞으로 이끌었다. 그는 담을 찬찬히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런 익선동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익선동이 곧 재개발 되잖아요. 익선동 땅 주인들이 재개발 추진을 위해 조합 설립을 위한 동의서를 걷고 있어요.”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제가 언젠가 서울시 공무원을 데리고 근처 높은 건물에 올라가 익선동을 함께 내려다본 적이 있어요. 공무원에게 말했죠. 여기 재개발하면 안 된다고. 서울에 이렇게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동네가 어디 있겠냐고. 집이 낡긴 했지만 지붕만 개량해도 익선동은 역사와 이야기를 담은 서울 제일의 관광코스가 될 수 있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노기 섞인 애틋함이 묻어나왔다.
○ “내가 무슨 점쟁이야, 그치?”
맥주잔에 부은 소주도 바닥에서 찰랑인다. 술이 비워질수록 점쟁이의 ‘현실’ 고민은 깊어져갔다. “예전엔 판사 검사가 오고, 의사가 찾고, 교수 발길도 이어졌지. 이젠 손님이라고 해봐야 다 뜨내기라고. 그렇게 잘나가던 이 동네가 말야.”
정 씨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이제 막 불을 붙인 담배를 내려놓으며 휴대전화 액정의 발신자 표시를 확인했다. 고개를 돌려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통화를 시작했다. “나 진짜 그 언니 믿었다. 돈이 아까워서 이러는 게 아니라니까. 사람한테 데는 게 싫은 거지. 그래도 별수 있겠어. 돈이 원수지.”
짧은 통화가 끝나고, 내려놓았던 담배를 다시 물었다. 눈은 이미 풀려 있었다. “내가 점 봐주고 있는 집이 보증금 2000만 원에 월 50만 원인데 집주인이 월세를 150만 원으로 올려달라고 하네. 3월이면 계약이 끝나는데.” 한숨이 이어졌다.
“아. 근데 아까 뭐 물어봤지? 여기 재개발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어쩔 수 있나. 떠나야지. 근데 자칫하면 재개발 시작하기도 전에 월세 때문에 먼저 떠날 수 있겠어. 무당이라서 다른 곳에서 집 구하기도 어려운데…. 하다못해 이 동네에서도 집 구하기가 어려워. 웃기지? 내가 19년 동안 사람들 미래를 봐줬지만 정작 내가 갈 곳은 모르잖아. 내가 무슨 점쟁이야, 그치?”
그의 눈이 촉촉해졌다. 젖은 눈동자 틈으로 익선동의 과거와 오늘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소주가 비워진 맥주잔으로 점쟁이의 한숨이 덩어리째 떨어졌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조영달 기자 dalsar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