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수림 수필가·구리문인협회 부지부장
그 영화엔 내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허름한 술집에서 상다리가 부서져라 젓가락 장단을 맞추고, 신명나는 노래를 불러 젖히던 장면들이 아스라이 스쳐갔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데는 군부대가 마을을 감싼 아늑한 곳이었다. 작은 마을에 군인들을 상대하는 술집이 여럿 있었던 것도 생각난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동네에서 운영하는 구판장이나 허름한 대폿집에서 고단함을 달래곤 했다.
아버지는 한이 서린 듯한 구성진 목소리를 가졌다.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서글프고 가슴 아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소리 나는 곳으로 다가가 반쯤 열린 창문 밑에 가만히 섰다.
방안은 흥과 열기로 가득했다. 궁금했다. 방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창문이 높아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디딤돌을 놓고 까치발을 들고서야 간신히 안을 엿볼 수 있었다. 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목청껏 불러 젖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저런 얼굴 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넘치도록 행복한 얼굴이다. 뭘까. 나는 잠시 가만히 노랫소리를 들었다. 비록 어른들의 세계는 알지 못하지만 뭔지 모를 애잔함이 뭉클하게 올라왔다. 어찌 해야 할까. 나의 갈등과는 상관없이 노래는 계속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나도 모르게 “엄마! 아버지 없어!”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겠다고 작심했던 것도 아닌데 얼떨결에 튀어나온 말이다. 그날 밤늦도록 울려 퍼지던 노랫소리는 우리 집 백열전구까지도 밤새 흔들어댔다.
다음 날 새벽 비질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깼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밤새 젓가락을 두드리던 아버지가 어느새 마당을 쓸고 있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바람 불고 눈발이 성글게 내리는 날. 막걸리 한 대접 들이켠 어른들의 퇴폐쯤으로 여겨졌던 장단소리가 새삼 그리워진다. 오늘, 막걸리 좋아하는 지인을 불러 빈대떡에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 할까 싶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 그런 아날로그적인 사소한 것들이 그리운 이유다.
전수림 수필가·구리문인협회 부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