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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태현]테헤란로의 망령과 국가 이익

입력 | 2012-02-02 03:00:00


김태현 중앙대 교수·국가대전략연구소 소장

서울의 전철역 중 가장 붐비는 강남역과 삼성역을 지상으로 연결하는 대로가 테헤란로다. 실리콘밸리에 빗대 테헤란밸리라고 불리면서 정보기술(IT) 강국 한국의 면모를 과시하는 이 길의 야경은 대단히 아름답다. 1970년대 후반에는 국기원 건물 하나만 달랑 있었다. 그 이후 나라가 발전한 모습에 가슴이 뿌듯하다.

그런데 그 무렵 이 길의 이름을 이란의 수도명을 따 테헤란로라고 붙인 과정은 그리 아름답거나 뿌듯하지 않다. 1973년 오일 위기를 일으켜 세계인들에게 고통을 준 대가로 제왕 같은 권력을 누린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주도하던 이란에 잘 보이려는 에너지 외교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힘없고 자원 없는 약소국의 서러움을 상기시켜 씁쓸할 따름이다.

그 테헤란로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북한처럼 핵무기 개발을 추진해 유엔의 제재를 받고 있는 나라가 이란이다. 2010년 6월 통과된 안보리 결의 1929호에 따라 이란 제재를 결정하면서 우리나라는 홍역을 치렀다. 그때 주한 이란대사는 노골적으로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31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의회를 통과한 2012년도 국방수권법에 서명했다. 이 법안에는 이란중앙은행과 거래하는 기업과 금융기관은 미국 금융망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포함돼 있다. 이란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유 거래가 중앙은행을 통해 결제되는 현실을 감안해 그것을 사실상 봉쇄하여 이란 정부를 압박하려는 조치다.

美, 이란 경제제재로 원유수입 비상

그러나 이 규정은 다른 나라에도 피해를 주는 일종의 ‘유탄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2011년도 수입원유의 9.4%를 이란에서 들여온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정유회사들은 수입원을 바꿔야 하고 그 과정에서 추가비용이 들 수 있다. 기타 이란과 거래하는 기업들도 사업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일방적인 조치로 제3국에 피해를 주는 미국의 ‘오만’을 비난하고, 유탄 효과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무력함’을 한탄하며, 예외 조치를 얻어내지 못하는 외교통상부의 ‘무능’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 크게, 더 멀리, 더 깊게 봐야 한다. 그로 인해 입을지 모를 몇천만 달러의 손실보다 훨씬 더 크고 중대한 국가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첫째, 미국의 입장이 단순하지 않다. 오바마 행정부는 세계 유가에 미칠 충격 때문에 의회가 주도한 그 조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500쪽에 달하는 법안의 극히 작은 부분일 뿐, 그 때문에 국방 전체에 관한 법안을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아가 경제 제재는 이란 핵 문제라는 엄중한 외교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둘째, 이란 핵 문제는 우리에게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이란이 핵무장을 하게 되면 세계 석유 매장량의 55%,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는 중동을 뒤흔들어 세계 에너지 질서를 교란할 수 있다. 이란산 석유의 일시적 금수 정도가 아니라 1973년 오일 위기를 넘는 충격이 올 수 있다. 또 이란의 핵무장을 막지 못하면 북한의 핵무장을 막을 명분이 약화되고 그 수단이 제한될 것도 분명하다.

셋째,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국가 이익, 나아가 외교력과 국력을 염두에 둬야 한다. 온갖 현안이 생겨나고 온갖 가치 사이에 혼란이 빚어지는 국제정치에서 나라의 이익을 지키고 증진하는 데 힘, 곧 국제적 영향력만큼 유용한 것은 없다. 그래서 국가 이익은 힘으로 정의된다.

국제적 영향력 또는 외교력은 그 나라가 가진 실력과 다른 나라로부터 인정받는 매력의 함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2012년의 대한민국은 OPEC에 무릎 꿇고 매달렸던 1970년대와 다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군사대국이다. 경제발전과 민주화, 그리고 한류로 세계를 매료시키고 있다. 그런데 외교력은 그 실력과 매력에 미치지 못한다.

실력과 매력을 외교력으로, 결국 국익과 국력으로 전환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 외교 태세다. 가치지향적 보편외교, 국익으로 절제된 외교, 때로는 사자처럼 위용 있는 외교 태세다. 이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보복협박땐 단호히 대응해야

첫째, 북한의 비핵화를 포함한 핵무기의 비확산이라는 가치를 추구함에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는 북한에 대한 제재 이행을 촉구하면서 이란에 대한 제재에 우리가 소극적이면 망신스러울 따름이다.

둘째, 그렇지만 이란이라는 나라 자체, 또 그 국민과 얼굴 붉힐 이유는 없다. 이란에 대한 제재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와 국가 이익의 문제일 따름이다.

셋째, 그런데 안보리 결의에 따라 회원국으로서 이행하는 제재에 대해 이란 정부가 굳이 한국을 지목해, 혹은 주한 이란대사가 보복하겠다고 협박하면 사자처럼 대응해야 한다.

한번 우습게 보면 두고두고 우습게 보고, 한 나라가 우습게 보면 다른 나라도 우습게 보는 것이 국제정치다. 우리나라는 이제 우습게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김태현 중앙대 교수·국가대전략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