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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한줄]삶이 고달파도 버텨내는 건 지금이 곧 영광의 시대니까

입력 | 2012-02-04 03:00:00


《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난 지금입니다.”

-만화 ‘슬램덩크’ 중에서
취미 삼아 다니는 권투도장 위층엔 묘한 간판의 ‘체육관’이 하나 더 있다. 일종의 사교댄스 클럽 같은데, 60대 이상 어르신들이 대다수다. 주차관리인에게 “운동하러 왔소”라고 하시는 걸 보니, 확실히 ‘체력 증진의 전당’은 맞는 듯한데…. 재미있는 건 그분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풍경이다.

“에구 에구, 웬 계단이 이리도 많누.”

“너무 오래 흔들었나. 좀 쉬었다 가세.”

숨이 차 힘겨워하는 건 기본. 난간을 잡고 쩔쩔매는 분도 계신다. 근데 얼핏 들어보면 춤을 몇 시간씩 추셨단다. 계단도 벅찬 양반들이 댄스를? 괜히 탈이라도 나실까 걱정되는데 동료가 한마디 한다.

“걱정 마. 설날에도 나오시는 분들이야. 어르신들은 지금이 ‘전성기’일걸?”

누구나 안다. 영원한 건 없다. 이 칼럼 시작 때 맨 처음 떠오른 고민은 ‘마지막 만화는 어떤 걸 할까’였다. 첫 만화도 정하기 전에 끝을 생각한 이유? 영원은 없으니까. 그땐 이리 빠를 줄 몰랐지만 뭐든 폼 나게 매조지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마무리는 두통거리였다. 끝내줘야 하는데, 누구든 공감해야 하는데. 아니지,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해야지. 인생 최고의 만화를 골라야지. 일주일 새 두세 번씩 맘이 바뀐 적도 있다.

먼저 점찍어 둔 건 ‘베르세르크’였다. 친구를 팔고 악마가 된 사내를 쫓는 한 검객의 길고긴 여정. 너무 연재가 느린 게 흠이지만 정말 ‘짱’이었다. 뛰어난 그림체? 종교와 철학을 넘나드는 주제의식? 그래, 다 맞는 말이지만 ‘북두신권’ 이래 가장 마초의 피를 부글부글 끓게 한 만화였다.

아다치 미쓰루(安達充)의 만화들도 계속해서 들추곤 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여운의 미학’. 어릴 땐 참 불친절한 만화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 청춘의 몰아치는 감정을 그 느긋한 풍경 속에 고즈넉이 풀어놓는 작가의 공력. 명불허전(名不虛傳). 봐도 또 봐도 재미나다.

말하자면 끝이 없다. 10대를 뒤흔든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공작왕’ ‘드래곤 볼’과 ‘시티 헌터’는 삼국지나 영웅문만큼 읽고 또 읽었다. 이상무나 고행석부터 강풀과 조석도 계속 만지작거렸고…. ‘아기와 나’ ‘내일의 조’ ‘이나중 탁구부’ ‘홀리랜드’ ‘다크 나이트’. 더 열거하면 머리만 아프다.

그 와중에 ‘슬램덩크’는 너무 편한 길이 아닐까 하는 자책도 들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최고니까. 뽑아낸 한마디도 워낙 회자된 말이다. 스타워즈의 “내가 네 아빠다” 수준이랄까. 장고 끝의 악수처럼, 참 식상하고 뻔한 결정이었다.

허나 변명하자면 선정 이유는 이 한마디, ‘영광의 시대’ 때문이었다. 그 숱한 만화들. 수험생 때 정신 못 차리고 봤건, 하릴없던 백수시절에 읽었건. 하나하나 다 소중하고 고마웠던 작품들이다. 영광을 논할 정도로 거창한 인생을 살진 않았지만 그 멋진 작품들을 접하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빛나고 아름다웠다(榮光)’.

‘체육관’ 어르신들도 그렇지 않을까. 물론 그분들의 옛일은 아는 바 없다. 하지만 무대에서 어울려 춤을 추는 건 당신들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일 터. 설령 다리가 후들거려도, 맘에 드는 짝을 찾지 못해도. 거나한 ‘뽕짝’ 소리가 가슴을 뛰게 하는 한. ‘영광의 시대’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자주 고단하다. 어깻죽지가 뻐근할 만큼 벅차기도 하다. 그러나 만화 속에 펼쳐진 세상에서 주인공들은 그 말도 안 되는 역경과 고난을 버텨낸다. 등이 부서져도, 친구 혹은 삶 자체가 배신해도. 만화니까 그렇다고? 코웃음 치기 전에, 스스로에게 한마디 꼭 짚어주자. 그게 그들에겐 영광의 시대여서라고. 그들이 그러는 한 우리도 그렇다고. 지금은 영광의 시대니까.

ray@donga.com  

레이 동아일보 소속. 처음에 ‘그냥 기자’라 쓴 후 O₂ 팀에 성의 없다고 혼나는 것도 이제 끝. “O₂ 의 영광의 시대는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