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슬램덩크’ 중에서 》
취미 삼아 다니는 권투도장 위층엔 묘한 간판의 ‘체육관’이 하나 더 있다. 일종의 사교댄스 클럽 같은데, 60대 이상 어르신들이 대다수다. 주차관리인에게 “운동하러 왔소”라고 하시는 걸 보니, 확실히 ‘체력 증진의 전당’은 맞는 듯한데…. 재미있는 건 그분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풍경이다.
“에구 에구, 웬 계단이 이리도 많누.”
숨이 차 힘겨워하는 건 기본. 난간을 잡고 쩔쩔매는 분도 계신다. 근데 얼핏 들어보면 춤을 몇 시간씩 추셨단다. 계단도 벅찬 양반들이 댄스를? 괜히 탈이라도 나실까 걱정되는데 동료가 한마디 한다.
“걱정 마. 설날에도 나오시는 분들이야. 어르신들은 지금이 ‘전성기’일걸?”
누구나 안다. 영원한 건 없다. 이 칼럼 시작 때 맨 처음 떠오른 고민은 ‘마지막 만화는 어떤 걸 할까’였다. 첫 만화도 정하기 전에 끝을 생각한 이유? 영원은 없으니까. 그땐 이리 빠를 줄 몰랐지만 뭐든 폼 나게 매조지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마무리는 두통거리였다. 끝내줘야 하는데, 누구든 공감해야 하는데. 아니지,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해야지. 인생 최고의 만화를 골라야지. 일주일 새 두세 번씩 맘이 바뀐 적도 있다.
아다치 미쓰루(安達充)의 만화들도 계속해서 들추곤 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여운의 미학’. 어릴 땐 참 불친절한 만화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 청춘의 몰아치는 감정을 그 느긋한 풍경 속에 고즈넉이 풀어놓는 작가의 공력. 명불허전(名不虛傳). 봐도 또 봐도 재미나다.
말하자면 끝이 없다. 10대를 뒤흔든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공작왕’ ‘드래곤 볼’과 ‘시티 헌터’는 삼국지나 영웅문만큼 읽고 또 읽었다. 이상무나 고행석부터 강풀과 조석도 계속 만지작거렸고…. ‘아기와 나’ ‘내일의 조’ ‘이나중 탁구부’ ‘홀리랜드’ ‘다크 나이트’. 더 열거하면 머리만 아프다.
그 와중에 ‘슬램덩크’는 너무 편한 길이 아닐까 하는 자책도 들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최고니까. 뽑아낸 한마디도 워낙 회자된 말이다. 스타워즈의 “내가 네 아빠다” 수준이랄까. 장고 끝의 악수처럼, 참 식상하고 뻔한 결정이었다.
허나 변명하자면 선정 이유는 이 한마디, ‘영광의 시대’ 때문이었다. 그 숱한 만화들. 수험생 때 정신 못 차리고 봤건, 하릴없던 백수시절에 읽었건. 하나하나 다 소중하고 고마웠던 작품들이다. 영광을 논할 정도로 거창한 인생을 살진 않았지만 그 멋진 작품들을 접하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빛나고 아름다웠다(榮光)’.
인생은 자주 고단하다. 어깻죽지가 뻐근할 만큼 벅차기도 하다. 그러나 만화 속에 펼쳐진 세상에서 주인공들은 그 말도 안 되는 역경과 고난을 버텨낸다. 등이 부서져도, 친구 혹은 삶 자체가 배신해도. 만화니까 그렇다고? 코웃음 치기 전에, 스스로에게 한마디 꼭 짚어주자. 그게 그들에겐 영광의 시대여서라고. 그들이 그러는 한 우리도 그렇다고. 지금은 영광의 시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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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동아일보 소속. 처음에 ‘그냥 기자’라 쓴 후 O₂ 팀에 성의 없다고 혼나는 것도 이제 끝. “O₂ 의 영광의 시대는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