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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50돌 맞은 ‘공업도시 울산’ 탄생 두 주역

입력 | 2012-02-06 03:00:00

“울산, 허허벌판서 1000억달러 수출 산업수도 변신 감개무량”




울산공업단지 지정 50주년 기념식에서 정부로부터 동탑산업훈장과 산업포장을 받은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오른쪽)과 김의원 전 경원대 총장. 두 사람은 1962년 당시 각각 상공부 공업1국장과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으로 있으면서 울산의 공업전략과 도시전략을 이끌었다. 울산=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아무래도 한국 울산 주변의 정황이 심상치 않았다. 변변한 항만시설도 없는 곳에 기계와 시설자재를 실은 대형선박들의 왕래가 부쩍 잦아졌다. 1962년 초, 옛 소련의 신경은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울산은 인구 8만5000명 정도의 전형적인 농어촌에 불과했다.

‘혹시 미국이 군항(軍港)이나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소련은 즉각 지금의 울산광역시 앞 공해(公海)상에 잠수함을 보내 감시에 나섰다. 소련의 감시는 이후 5년간이나 계속됐다고 일본 방위성 자료는 밝히고 있다.

1962년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1월 15일), 울산이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공업도시를 만들기 시작한 원년(元年). 경제개발5개년 계획 발표 2주일여 뒤인 그해 2월 3일 울산공업단지 기공식과 함께 시작된 ‘공업도시 울산’의 역사가 며칠 전 50주년을 맞았다.

마침 한국이 수출 1조 달러 시대를 달성하고, 그중 1000억 달러를 울산이 기록한 직후다. 1000억 달러면 이란, 덴마크의 총 수출액보다 많은 규모다.

기념식 당일 울산을 찾았다. 머릿속엔 ‘세 도시 이야기’가 맴돌았다. 1962년 박정희의 울산, 1990년 기자가 겪었던 골리앗 크레인의 울산, 그리고 태화강에서 시민수영대회가 열리는 지금의 울산. 세 도시는 같지만 다른 도시였다.

먼저 ‘박정희의 울산’을 만났다. 울산시는 기념식을 맞아 울산공업지구를 입안(立案)한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84), 도시 건설을 진두지휘한 김의원 전 건설부 국토계획국장(81)을 초청해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박 대통령이 ‘오 국보(國寶)’라고 불렀다는 오 전 수석은 서울대 공대 화학공업과 재학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기술 장교로 투신한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 울산공업도시 개발 초기엔 상공부 공업1국장이었고, 1970년대(1971∼1979년)엔 청와대 경제2수석비서관으로 중화학공업 정책을 진두지휘했다.

그를 만난 곳은 울산현대호텔 2층 일식당. 공교롭게도 노동자들의 권익투쟁이 절정이던 80년대 말, 90년대 초 현대그룹이 취재기자들을 위한 프레스센터로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당시 현대그룹 간부들은 기자들을 ‘매수’하기 위해 돈봉투를 싸들고 프레스센터 주위를 맴돌았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오 수석님도 감회가 깊겠습니다. 지금 울산을 보면 정말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실감날 것 같습니다.

“(웃으며) 나를 칭찬해주는 말 같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슨 감회 같은 건 없어요. 우리 같은 기술자들은 실패는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죽어라고 뛸 뿐입니다.”

―당시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씨 등 기업인들의 건의로 한국 최초의 울산공업단지 결정이 이뤄졌다고 들었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1961년 5·16혁명이 일어나기 전 민주당 정권 때부터 부정축재 기업인들에 대한 단죄가 시작됐습니다. 혁명정부가 그들을 구속까지 하면서 조였지만 돈을 쌓아 놓고 있는 기업인들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공장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람들밖에 없었어요. 경제개발은 혁명공약이었고…. 그래서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기업인들에게 경제개발계획을 설명하고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감옥에 가든지, 경제개발을 돕든지 말입니다.”

―나머지 반은 뭡니까.

“밴플리트 장군입니다. 풀려난 부정축재 기업인들은 혁명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적극 협력하기로 하고 ‘경제재건촉진회’를 만들었습니다. 부정축재자들이 모여 협회를 만든다고 하면 꼴사나우니까 부정축재 하지 않은 사람까지 합쳐서 만든 거죠. 그게 지금의 전경련입니다. 여하튼 그 사람들을 미국, 유럽으로 시찰을 보냈는데 그때 미국 내 공장 시설을 둘러볼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바로 밴플리트 장군입니다.”

6·25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제임스 A 밴플리트 육군 대장은 ‘한국전의 영웅’으로 불린다. 전폭기 조종사였던 외아들도 한국전에서 잃었다. 한미 양국의 우호협력 증진을 내걸고 창설된 코리아소사이어티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밴플리트 장군의 역할이 컸던 모양입니다.

“밴플리트 장군은 미국 안에서 5·16혁명을 지지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 양반이 발 벗고 나섰지만 미국 사람들은 ‘당신들이 가져온 건 기계들을 사기 위한 쇼핑리스트일 뿐이지, 경제개발 계획서가 아니다’라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러고는 ‘공장은 어디에 지을 것인가?’ ‘전기나 물, 항만이나 교통시설은 어떤가?’라고 묻는데 우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걸 준비해놓고 연락할 테니 한 번만 와 달라’고 했죠. 그리고 돌아와서 부랴부랴 울산공업지구 기공식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밴플리트 사절단’을 유치하기 위해 급히 만든 것이 울산공업단지입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한 직후였죠? 그리고 64년 드디어 수출 1억 달러 고지를 돌파하게 되고….

“당시 박충훈 상공부 장관이 박 대통령에게는 1억 달러를 달성하겠다고 했지만 상공부에 돌아와서는 ‘1억2000만 달러가 각하의 지시’라고 했습니다. 실제 1억2000만 달러를 달성했죠. 대한민국의 기본시책, 아니 국시(國是)는 분명합니다. 수출제일주의입니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사람밖에 없는데 무엇으로 먹고삽니까? 그리고 사람의 힘만으로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건 공업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1억 달러 달성을 위해 애쓰던 나라가 1조 달러의 위업을 이뤄냈습니다. 신라의 3국통일보다 더 큰 위업이요, 역사적 사건입니다. 울산이 그중 1000억 달러를 수출했습니다. 왜 칭찬을 안 해줍니까. 온 세상이 박수치고 칭찬해줘야 합니다. 축제도 보통 축제가 아닙니다.”

―기억에 남는 일은….

“현대자동차 대표이사 사장을 한 정세영 씨는 나한테 늘 혼났습니다. 처음엔 폴크스바겐과 합작을 하겠다고 왔었습니다. 폴크스바겐이 동양에서 판매하는 차량 대수가 8만 대쯤 되는데 그거면 자동차 공장을 할 수 있겠다는 거였죠. 내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나는 국민차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10년이 지나도 바꾸지 않을 차를 만들어 개량하고 또 개량해 76년까지 완전 국산화하라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의 지시각서까지 내주며 폴크스바겐과 합작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공군 소령으로 전역한 오 전 수석의 첫 직장은 국내 최초의 자동차회사인 시발자동차 공장장이었다. 그리고 ‘국산자동차주식회사’ 공장장도 맡는다.

오 전 수석은 “여하튼 울산은 혁명정부의 경제개발 공약 실천의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였다”고 했다.

그가 공업전략가였다면, 당시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인 김의원 전 경원대 총장은 도시전략가였다.

김 전 총장은 50주년 기념일 전날 울산에 내려가 도시 곳곳을 둘러봤다.

―울산엔 얼마 만에 오신 겁니까.

“40년 만입니다.”

―처음 도시를 개발할 땐 어땠습니까.

“허허벌판이지 뭐. 아무것도 없을 때였죠. 어젯밤 호텔에서 석유화학단지의 야경을 바라보니까 정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도 울산을 경제개발의 시발점, 대한민국 첫 공업도시로 지목하게 된 배경이 있지 않겠습니까.

“지리적으로 유리했죠. 그리고 이병철 씨가 비료공장, 삼양사가 설탕공장,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원산에서 울산으로 옮겨놓은 정유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정도면 공업지구를 할 만했습니다. 특히 이병철 씨는 항만 조건을 주목했습니다. 울산은 따로 방파제가 필요 없는 곳입니다. 방파제 만드는 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압니까? 무지무지하게 들어갑니다. 울산은 지금도 방파제가 없지 않습니까?”

―역시 기업인들의 건의가 직접적인 출발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병철 씨가 당시 한국경제인연합회장이었지만 재벌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입니다. 부정축재라고 하지만 이병철 씨만 해도 일제 때부터 가지고 있던 술도가(양조장)하고 울산의 비료공장, 대구의 섬유공장뿐이었습니다. 이병철 씨가 중앙정보부장이던 JP(김종필)에게 부탁해 박정희 의장을 만났죠. 그러고는 ‘경제개발을 한다는데 군인이 할 수 있습니까? 결국 우리 같은 기업인들이 해야 하는데 왜 묶어 놓고 있습니까?’라고 했죠. 이병철 씨는 그때 이미 몇몇 기업인과 울산 개발 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울산은 일본이 한일강제병합 직후부터 조선과 연결하는 관문으로 검토되던 곳이었습니다. 일본∼울산이냐, 일본∼부산이냐를 놓고 일본 내에서 양론이 많았습니다. 결국 부산으로 결정됐지만 말입니다.”

―박 대통령은 자주 왔습니까.

“울산 개발엔 모두 14년이 걸렸습니다. 박 대통령은 두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왔습니다. 그 다음 경부고속도로 공사 때는 매주 가셨지만 당시 박 대통령이 그렇게 정기적으로 자주 방문한 곳은 울산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울산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산업수도, 국부(國富)의 원천을 자임하고 있다. ‘한강의 기적’이란 말과 ‘태화강의 기적’은 같은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인당 4만 달러, 소득수준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다.

물론 노동자들의 권익투쟁으로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던 때도 있었다. 노동자들은 ‘골리앗 크레인 농성’(1990년 현대중공업)까지 벌이며 공업화 과정의 아픔을 호소했지만, 정부와 기업은 부산 경남은 물론이고 서울에서까지 전투경찰을 동원해 투쟁을 잠재워야 했다. 도시는 도시대로 한국의 대표적인 ‘공해도시’의 낙인을 면치 못했다.

울산공업단지 기공식 1962년 2월 3일 울산 공업단지 기공식은 ‘공업입국’의 신호탄이었다. 군복을 입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울산공업단지를 혁명공약(경제개발)의 아이콘으로 내세웠다. 울산시 제공

하지만 50주년을 맞은 2012년. 울산은 ‘지속가능한 개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3선째인 박맹우 시장의 10년 전 첫 취임사가 “시장 임기를 마치고 나갈 때 ‘울산의 젖줄, 태화강을 살린 시장’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현장에서 그 변화를 지켜봐온 동아일보 울산 주재 정재락 기자는 “박정희 의장은 울산공업단지 기공식 격려사에서 ‘산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 국가 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울산은 검은 연기를 넘어 생태산업도시로 되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울산을 보면 진보(進步)를 믿게 된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