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 월간 PAPER 발행인
나는 좋은 부모님 슬하에서 성장했고, 남들 다 가는 대학에 진학해 부모님께서 꼬박꼬박 주시는 등록금을 얌전히 내고 무사히 졸업했다. 연애도 열심히 했고, 군대도 즐거운 마음으로 잘 다녀왔다. 한 대기업의 홍보실을 1년쯤 다니다가 월급을 2배쯤 주는 언론사로 직장을 옮겼고, 그곳에서 7년 동안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사이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다. 승승장구 탄탄대로의 20대를 지나 30대 초반으로 진입한 상태였다. 부러울 것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릴 적 꿈이 ‘훌륭한 화가’였는데 직장생활을 하면 도저히 그 꿈을 이루기 어렵겠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7년 동안 몸담았던 회사를 나와 프랑스로 그림 공부를 하러 가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아내와 한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유학길에 올랐다. 젊은 시절부터 늘 동경했던 프랑스 유학의 꿈을 실천한 것이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처럼 기뻤다. 프랑스 화단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주목할 만한 작가로 부상하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그러나 파리 근교 미술대학에서 2년 동안 공부하며 깨닫게 된 건 프랑스 화단에서 주목받으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이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멋대로 만드는 책을 세상에 펴내기 시작했을 때 나이가 30대 중반이었는데 어느덧 백발이 됐다. 나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저질러 보았다. 그러니까 내겐 ‘버킷 리스트’라는 게 사라져버린 셈이다. 이걸 행복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으나 내 뱃속이 후련한 상태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도 내가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은 일이 하나 있긴 하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잘 죽는 일’이다. 이루어지면 좋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평생 동안 꿈꿔온 일 중의 하나가 죽기 전에 나 자신을 모두 비우는 일이다. 어차피 내 영혼이 나의 육신을 떠나게 되면 손 안에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놓아버리게 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것은 마치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과 같이 분명한 일이므로 아직 내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비우는 일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김원 월간 PAPER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