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기 통해 조손가정 아이들 상처 낫게하고 싶어요
이강남 씨가 7일 오후 경기 용인시 성복동 자신의 아파트에 있는 작업실에 앉아 그림책을 펴보고 있다. 그는 남이 그린 그림을 보며, 또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면서 그 안에 담긴 감성을 끄집어내는 것을 즐긴다. 용인=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이강남 씨(70)는 이 말이 가장 듣고 싶다고 했다. 소박한 바람처럼 보이기도, 참 뜬금없는 얘기 같기도 하다. 내가 나답다는 게 뭘까. 그는 자신의 부족한 허물을 꼭꼭 감추려다 보면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부족함마저 ‘나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게 바로 내가 나답게 사는 길이란다. 물론 그걸 깨닫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고 한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이 씨는 어떻게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됐을까.
‘프로’ 금융인에서 ‘아마추어’ 화가로
그러나 은퇴 후에는 현직에 있을 때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주말이나 돼야 겨우 만나던 ‘애인’을 매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그림이었다. 그는 한국은행 조사부장으로 있던 1997년 김일해 화백에게서 처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창 일이 넘치던 때였기에 주말에 한 번 시간을 내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에겐 사치였다. 그러나 그는 “바빴기 때문에 더 재미있었다. 항상 토요일 오후를 기다리며 살 정도로 그림에 푹 빠져버렸다”고 기억한다.
그를 사로잡은 그림 그리기의 첫째 매력은 ‘몰입’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몰아지경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정화되고, 치유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새로워졌다.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내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주변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던 중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자기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제 그림을 조금만 물러서서 보면 무의식중에 그린 선들의 흐름이 참 오묘하더군요. 또 어떨 때는 색의 연결이 환상적이었고요. 그걸 보면서 ‘내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참 많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저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다만 ‘화가’라는 표현만큼은 언제나 부담스럽다. 2002년과 2003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두 차례나 입상했고 개인전 경험도 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아마추어’라 부른다. 아마추어는 최대한 아마추어다워야 생명력이 더 길지 어쭙잖게 프로 흉내를 냈다가는 보는 이에게 불편함만 줄 수 있다는 게 이유다.
미술에서 감성을 찾아내다
이 씨는 금융연수원에서 은행 지점장들을 대상으로 했던 한 강의 얘기를 꺼냈다. 강의에 앞서 그는 수채화 물감과 A4용지를 나눠주고는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손끝이 가는 대로, 머뭇거리지 말고 무엇이든 그려보라고 했다. 10분 정도 후. 그는 수강생들에게 자신의 그림에 사인한 뒤 가족에게 선물을 하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몇몇이 다시 그리기를 강력히 요청했고, 그는 할 수 없이 모두에게 A4를 나눠주고 다시 10분을 기다렸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첫 번째는 상당수가 정말 좋은 그림들을 그렸어요. 그런데 똑같은 요령으로 그리라고 했는데도 두 번째 작품 중에는 칭찬하고 싶은 그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선물을 한다고 생각하니 남을 의식하게 된 거죠. 자기가 예전에 봤던 그림을 흉내도 내고, 작위적으로 연출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도저도 아닌 그림이 된 거예요.”
“모든 솔루션은 그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걸 그림을 통해 토해내도록 돕는 것이죠.”
이 씨는 2시간 남짓한 인터뷰 말미에 소설가 최명희(1947∼1998)의 ‘혼불’에 나온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는 구절을 소개했다. 그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인간은 불안, 걱정, 외로움과 늘 함께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어두운 면을 벗어나야 빛으로 갈 수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어둠에 정직하게 머물 수 있어야 밝은 빛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앞으로 추상화라는 새로운 시도를 할 예정이다. 그림의 형식은 어느 것이라도 좋다. 그는 앞으로도 마음속의 많은 것을 그림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작정이다.
용인=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