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 시절 중학진학 꿈 키워준 호랑이 선생님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나흘을 걸어서 도착한 피란지는 경기 화성군의 바닷가였다. 그곳에서 면 소재지에서 20리나 떨어져 있는 교실 4개짜리 분교에 다녔다. 한 학년이 한 반씩밖에 없었는데도 교실이 부족하여 1학년부터 4학년까지는 2부제 수업을 했고 5, 6학년만 전일 수업이었다. 교과서도 없었고 숙제도 없었다.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에 비하면 게딱지만 한 학교였지만 마을 끝자락에서 시작되는 시커먼 갯벌은 그 망망한 크기로 나를 압도했다.
어린 나는 처음 경험해 보는 시골 생활이 여러 가지로 불편했지만 한편으로는 농어촌 생활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여름이면 우리는 갯벌에 나가서 맛살(조개)을 캐고 누룩지(망둥이) 낚시를 하며 즐겼다. 몇 달만 견디면 서울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던 우리 가족은 세 번의 추운 겨울을 초가집 단칸방에서 지내느라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도 많았다. 다양한 농기구의 이름과 사용법을 익혔고 어업에 사용되는 그물과 낚시를 만드는 방법을 관찰할 수 있었다. 같은 물고기도 크기에 따라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현상은 너무도 신기했다.
선생님의 열정과 포부를 알 리가 없는 철부지인 우리 학년 아이들은 수업 중에도 바닷가에서 잡아온 게들을 풀어 놓고 잡으러 다니는 장난을 치곤 했다.
선생님은 진학에 관심 없는 현지 학생들보다 피란 온 학생들에게 준엄하셨다. “전쟁이 끝나면 너희들은 도시에 있는 예전 학교로 돌아간다. 지금 놀기만 하다가 도시학교로 가면 너희들은 꼴찌가 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현재가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아라.”
6학년 때 우리 학년은 모두 30명쯤이었다. 그중 중학교에 진학하려는 사람은 5, 6명뿐이었다. 1953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우리가 국가고사에 응시원서를 내고 시험장을 배정받았을 때 우리 가족은 그때 마침 나온 도강증(渡江證)을 얻어서 서울 집으로 돌아갔다. 나와 나의 누이는 피란 집에 남아서 시험날을 기다렸다. 전쟁 중에 중학교 입학시험이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열세 살짜리가 부모와 이별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어머니 아버지가 안 계셔서 더 자유로웠다. 진학반 아이들은 며칠 안 남은 시험에 대비하여 이장댁에 마련된 공부방에 다녀야 했는데 나는 피란지에서 배운 썰매타기가 더 즐거웠다.
며칠 후 선생님으로부터 호출이 떨어졌다. 즉시 공부방으로 끌려가 나는 많은 친구 앞에서 호랑이 선생님에게서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국가고사가 끝난 뒤 성적표를 받아 들고 나와 누이는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모두가 원하던 중학교에 무난히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사범학교 출신 호랑이 선생님의 무한한 헌신 때문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절체절명의 기간에 나는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현재가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는 평범한 진리는 그 후 열악한 군대생활, 기나긴 인고의 유학생활을 견디게 한 일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선생님은 서해의 작은 섬인 이작도의 초등학교 교장직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셨다. 올해 89세라고 말씀하시는 전화 속 선생님의 목소리는 아직도 건장하시다.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 전 한국전통문화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