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1926∼1984/디디에 에리봉 지음·박정자 옮김/640쪽·2만5000원·그린비
미셸 푸코는 철학자이자 투사 그리고 성인(聖人)이었다. 그린비 제공
1984년 푸코는 에이즈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이런 짓궂은 질문이 떠오른다. 한때 불치의 역병이었던 에이즈가 이제는 평범한 만성질환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과연 이 양반은 어떻게 대꾸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의 사진을 통해 익숙한 파안대소이다. 그렇다, 그는 이 능청맞은 세계에 무엇보다 먼저 웃음으로 응대하였을 것이다. 아마 좀 더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다면 푸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의 침범으로 생겨난 하나의 질병을 둘러싸고 어떻게 숱한 지식의 쟁투, 윤리의 전장, 권력의 각축이 벌어지는지 추적하고 고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 푸코다울 것이다.
자신의 실존적인 체험을 사고의 일반적 원리와 상관시켜 집요하게 추궁하는 희귀한 철학자. 언제나 현재를 떠나본 적이 없는 철학자. 그러나 서글프게도 우리는 푸코의 박학다식한 음성과 열정적인 사자후를 들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더 강력하게 세상을 울린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사회학자
그렇지만 정작 푸코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었는가를 말해야 하는 자리가 되면 많은 이들은 서로 의견을 다투거나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푸코에게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어떤 중심적인 주제나 관심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 누군가의 말처럼 그를 어떤 지식의 이런 저런 분야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고 분류하기도 어렵다. 그가 창안한 지식의 고고학, 진실의 계보학이란 낯선 용어는 외려 그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학문의 범주 안에 소속되길 끈질기게 거부했음을 알려줄 뿐이다. 나아가 그는 20세기에 특별히 유별났던 어떤 지적 흐름의 상속자이자 계승자이지도 않았다. 그는 한때 공산당원이었지만 곧 탈퇴하였고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와는 평생 적대적이었다. 그가 한때 열혈 멤버인 것처럼 간주되었던 구조주의에 대해서도 언제나 불편해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푸코의 전기를 읽는다고 하여 그의 사유를 보다 투명하게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은 푸코보다 저자의 삶과 그의 사유 사이에 놓인 관계를 의심스런 눈길로 본 이도 없을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오랜 인간학적인 잠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역설했을 때, 푸코는 앎을 생산하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이야말로 어떤 앎을 진실로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댄디였고 또한 윤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실존을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다루기를 강조했던 이 사상가가 보여준 독특한 사유의 스타일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의 생애를 참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전기를 기꺼이 성인전(聖人傳)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어떤 경멸적이고 비꼬려는 의도가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인전이란 영웅적인 종교적 지도자에 대한 전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외려 우리는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기꺼이 자신의 사유의 재료로 삼고 그로부터 길어 올린 진실과 정의에 기대어 투쟁하는 지식인으로 거리에 섰던 한 사상가야말로 현대의 성인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인이 자신이 획득한 지식을 기꺼이 자신의 삶을 끌어가는 윤리로 바꾸어내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
마침 이 전기의 출간과 더불어 '푸코 이후의 정치와 철학'이란 심포지엄이 열린다(2월 22~23일, 정독도서관). 푸코의 사도들이라 불러도 좋을까. 푸코의 사상에 유의했던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푸코를 현재의 사상가로 다시 읽고 토론하는 이 자리는, 푸코의 전기를 깊이 읽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그를 지지하거나 혹은 거부해야 하는 이유들을 좇으며 그와 대결하는 젊은 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아마 이 전기를 읽는 즐거움은 배가될 것이 분명하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사회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