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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여명학교’ 조명숙 교감

입력 | 2012-02-27 03:00:00

“외국인 도울땐 진보좌익으로 몰더니, 탈북자 도우니까 보수우익?”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조명숙 교감은 인터뷰 도중 “중국에 억류돼 있는 탈북자들 걱정에 아이들이나 나나 제대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며 몇 차례나 눈물을 흘리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제발 살아만 달라’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차인표 씨 등 낯익은 연예인들이 중국에서 체포된 탈북자 북송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하던 21일 서울 종로구 효자동 주한 중국대사관 앞 시위 현장. 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10대 탈북 청소년들이 ‘친구를 구해 주세요(Save My friend)’라고 쓴 피켓을 들고 나와 눈물범벅으로 호소하는 모습도 보였다.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의 재학생과 졸업생들이다. 우리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잊고 사는 탈북자들의 존재가 다시 한 번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여명학교 조명숙 교감(42)을 만나기 위해 25일 서울 남산자락 입구 길가에 있는 학교(서울 중구 소파로 99)를 찾았다. 지하 2층, 지상 2층의 작은 건물에 교실 6개와 교무실 1개가 전부인 공간은 학교라기보다 1980년대 ‘야학 현장’을 떠올리게 했다.

조 교감은 컵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탈북 청소년들까지 시위에 나선 배경이 궁금했다.

“매년 서너 차례 학생들과 인연 있는 사람들이 탈북하다 북송됐다는 소식이 들려 아이들이 패닉(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다. 이번에는 동년배인 청소년들이 포함돼 있다는 소식에 정도가 더 심했다. 여기 아이들 중에는 북한에 있을 때 남한으로 탈북을 시도했던 사람들이 붙잡혀 장마당에서 총살당하는 모습을 본 아이도 있다. 남한행을 시도했다가 잡힐 경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얼마나 매를 맞는지 이 아이들은 매우 잘 안다. 더구나 지금 중국이 억류하고 있는 탈북 주민들은 김정은이 ‘잡히면 죽인다’고 엄포를 놓았던 김정일 애도 기간에 잡혔다. 북송될 경우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할지 아이들은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가만있을 수가 없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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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교감은 “중국에서 탈북자 구출 일을 할 때 내 눈 앞에서 공안에 끌려가는 남자를 직접 본 적이 있다. 공포와 두려움에 가득한 표정과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21일 시위를) 하기로 결정은 했지만 아이들이 공개될 수는 없고 어떡하나 고민한 끝에 학교 후원자인 차인표 씨와 상의했다. ‘여명학교 일’이라면 내가 나서겠다며 흔쾌히 도와주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뒤에 숨을 수 있었다. 너무 고마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여명학교는 2004년 23개 교회와 탈북자 지원 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세운 도시형 대안학교. 전국 8개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중 유일하게 중고교 학력이 인정된다. 지금까지 모두 7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현재 16∼25세 70명이 재학 중이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탈북 청소년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70∼80%가 정규교육 과정을 못 끝낸 아이들이다. 10대 후반인데도 한글을 못 깨친 경우도 있다. 북한에 있을 때 식량과 석탄을 구하러 다니느라 공부를 접는 경우는 부지기수이고 학교에 다닌다 해도 댐 도로공사, 농촌 지원 전투에 동원돼 공부를 못 했다. 이틀에 한 끼가 고작이고 거리에서 주워 먹거나 산속에서 풀뿌리를 캐먹는 것으로 배를 채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렇게 살다 보니 빈혈, 원인을 알 수 없는 근육통, 각종 피부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예방접종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어 면역력도 형편없다. 굶주림에 익숙해진 탓에 갑자기 남한에서 하루 세 끼를 먹으니 60%가 소아당뇨에 걸린다.”

무엇보다 조 교감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어린 나이에 뇌리에 박힌 정신적 충격.

“오랜 시간 몸과 마음이 떠도는 생활을 하다 보니 남한 생활도 적응이 안 되는데 정해진 시간에 등하교 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불안감과 신경과민에 시달린다. 작은 자극에도 지나치게 과민 반응하는 경우도 많다. 부모들도 생활고에 시달려 신경을 못 쓰고 아픈 경우가 많다. 때로 부모 간병 하느라 학교를 나오지 못한다.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고 대학을 보내는 게 목표가 아니라 태어남과 동시에 굶주리고 할퀴어지고 뜯긴 그들의 몸과 마음을 사랑과 인내로 보듬어 주는 ‘치유’가 우선이다.”

조 교감은 학교 설립을 기획한 주역이자 아이들의 어머니 노릇부터 학교 운영까지 책임지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초중고교 대학까지 서울에서 마쳤다는 그는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됐을까.

1970년생인 그가 태어난 곳은 당시만 해도 서울의 대표적 빈민촌이었던 상계동. 하루 한두 끼 식사가 고작이었다는 그는 사람들이 세 끼를 먹는다는 것을 초등학교 들어가서야 알았을 정도로 가난하고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업에도 흥미를 잃고 방황하던 그는 “대학 나오면 나처럼 살지는 않을 것 아니냐”라는 어머니의 호소에 삼수 끝에 입학한다. 자신처럼 힘든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의 또 다른 부모가 되어 주고 싶은 생각에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범대(단국대 한문교육과)를 택한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 때 집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삶을 바꾼다.

“서툰 한국말을 쓰는 외국인이었는데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였다. 전화를 잘못 건 거였는데 내가 짧은 영어 몇 마디를 하니까 무조건 도와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거였다. 다음 날 그 사람의 친구가 산재를 당해 누워 있다는 구로병원으로 찾아갔다.”

그는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나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도와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라며 “게다가 당시엔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던 때여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돈이 없어 굶고 있다는 말에 보름 동안 매일 찾아가 밥을 사줬다”고 했다. 이후 자연스럽게 그들의 산재 협상을 도와주며 경험을 쌓았다. 그러던 중 아예 단체에서 같이 일하자는 청이 들어와 교사의 꿈을 포기하고 활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1997년 초 동료 활동가(현재 외국인 난민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이호택 씨)와 결혼도 했다. 그리고 신혼여행차 간 중국에서 충격적인 실상을 목격한다.

“당시 북한의 대기근으로 탈북자들이 하나둘 넘어오던 시절이었다. 남편이 남한에 취업했던 조선족들의 산재 보상과 취업 알선 사기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조선족들로부터 ‘중국에 숨어 있는 탈북자들의 처지가 말이 아니다, 꼭 만나 달라’는 말을 듣고 함께 만나게 됐다.”

조 교감은 ‘독립운동 하듯’ 탈북자들을 만나 일대일 면담을 했다.

“평안도 함경도 국경 근처에 살다가 먹을 게 없어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핏기 없는 얼굴에 공포에 질린,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유령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다. 쌀을 구하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돈을 받고 팔려온 여자들도 많았다.”

조 교감 부부는 서울로 돌아갈 생각도 못하고 현장에서 그들을 돕기 시작했다. 탈북자들이 넘어오는 국경지대로 옮겨 다니며 식량을 주고 서울의 지인들에게 연락해 돈을 모아 빼오기도 했다. 백두산 국경 지역에서는 몇 달 동안 움막을 짓고 탈북자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그러다 “돌아가도 죽고 여기(중국)에 남아도 죽을 바에야 제3국으로 가고 싶다”는 13명의 탈북자들과 제3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1997년 10월이었다.

“남편은 중국 쪽 국경에서 탈북자들을 보내고 나는 베트남 쪽 국경에서 이들을 받기로 돼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 13명의 탈북자들이 국경을 무사히 넘었는가 하는 순간 나를 포함해 모두 베트남 군인들에게 잡혔다.”

베트남 국경지대 군대 막사로 끌려간 조 교감은 “얼마나 무서웠는지 ‘살해당하기 전에 자살해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결국 달러 몇 푼을 주고 풀려나기까지 그날 하룻밤이 그때까지 살았던 스물여덟 해보다 길게 느껴졌다”고 했다.

구사일생 끝에 탈북자들을 베트남 하노이 한국대사관에 인도했지만 한국대사관과 베트남 정부 모두 탈북자를 맡지 않겠다며 떠넘기는 바람에 탈북자들이 국경 근처에서 흩어져 버렸다. 조 교감 부부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6개월 동안 이들을 수소문해 찾아내 무사히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

“일을 마치고 온몸이 탈진했다. 2년 동안 결핵과 간염으로 앓았다. 신앙적으로도 힘든 시기였다. 왜 내가 이런 힘든 일을 해야 하는지 신에게 대들었다. 국경을 건너다 총살당해 둥둥 떠다니는 탈북자들의 시신을 보면서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느냐’고 울부짖기도 했다.”

2년여 동안 마음과 몸을 추스르며 조 교감은 “단기적인 지원 사업보다는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결국 대안학교 설립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온갖 경험을 한 아이들이다 보니 잘못된 길로 빠져도 남한 선생님들은 속수무책이다. 그래도 나는 탈북자들을 돕느라 죽음 문턱까지 가봤고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도 체험한 사람이다 보니 아이들이 쉽게 마음을 연다. 하느님이 지난 시절 내게 주신 시련은 결국 이 아이들을 맡기려고 한 훈련이었다.”

그에게 현재 국내 탈북자 지원 시스템에 대해 물었다.

“당장 생계 해결이 급하다고 무조건 기술을 가르칠 일이 아니라 남한 사회의 제도 관습 문화를 가르치는 기초 교육이 중요하다. 또 연령대별로 교육을 전문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이들과 어른이 섞여 함께 정착 교육을 받다 보니 효과가 떨어진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지원 시스템을 통합하는 것도 필요하다.”

남과 북을 잘 알고 있는 그녀의 통일관이 궁금해졌다.

“학교 다닐 때 운동권 친구들을 보면서 쉽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거창한 말보다는 내 주변의 어려운 이웃 한 사람을 돕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 일을 도울 때 사람들은 내게 ‘진보좌익’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후 탈북자 돕는 일을 하니 ‘보수우익’이라고 한다. 도대체 이념이 뭔가, 사람 목숨은 이념 이전의 문제다. 그런데 지금 남한에서는 친북 종북을 외치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과 생명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념의 굴레에 사로잡혀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이런 세상은 다음 세대에는 물려주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