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산업부 차장
막강한 브랜드파워와 첨단 유통 노하우로 무장한 글로벌 유통업체들의 진출은 한국 유통산업에는 큰 위협이었다. 월마트가 한국에 진출할 당시 이 회사의 연매출은 165조 원. 당시 우리 정부 예산의 2배에 이르는 규모였다. 효율적인 상품조달을 위해 자체 인공위성까지 보유한 곳이 월마트였다. 국내 유통산업의 초토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까르푸는 이랜드에, 월마트는 신세계에 지분을 팔고 2006년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월마트 같은 글로벌 유통 공룡들이 왜 한국 시장에서 쓴맛을 보았을까. 월마트와 이마트의 전략을 비교해 보면 그 원인이 잘 드러난다.
미국에서 통하던 전략이 한국에서도 그대로 통할 것이라고 한국의 소비자들을 만만하게 본 것이 월마트의 결정적인 패인(敗因)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한국 소비자의 ‘입맛’이 까다로운 데다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읽어내고 거기에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선보인 것이 이마트의 승인(勝因)이었던 것이다.
최근 대형마트 규제에 관한 논란을 보고 있으면 정부와 정치권, 지방자치단체들이 월마트의 오류를 답습하려 한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어떤 논의에서도 ‘소비자’는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이 스스로 찾아올 수 있는 골목상권이나 재래시장만의 매력을 만드느냐 하는 논의는 실종된 채다.
전통상권의 침체가 대형마트의 부도덕과 탐욕 때문이라면 규제뿐인 정책도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전통상권이 빠르게 변하는 소비자의 입맛을 따라잡지 못한 데 있다. 한국의 소비자들이 어떤 존재인가. 입맛에 맞지 않으면 월마트나 까르푸 같은 브랜드도 가차 없이 내치는 소비자들이다. 전통상권만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지 못하면 대형마트 가는 것을 조금 불편하게 만든다고 해서 동네 슈퍼를 찾아갈 소비자들이 아니다.
25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에는 일본 도치기(회木) 현 전원지역 국도변에 있는 작은 빵집 기사가 실렸다. 10여 년 전 전자제품회사에서 희망 퇴직한 50대 부부가 운영하는 이 빵집의 특징은 주변이 논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곳에 있다는 점. 유행은 일절 따르지 않고 메뉴도 8개만 고집하지만 일부 메뉴는 예약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천광암 산업부 차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