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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내 인생을 바꾼 그것]사물놀이 김덕수의 남사당

입력 | 2012-03-03 03:00:00

일곱 살 때 ‘남사당에 신동 났다’ 전국 풍물패에 소문 좍∼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과 교수를 맡은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김덕수는 정착이라는 걸 모른다. ‘장구 신동’이었던 그가 4년째 전통연희 공연을 치르고 있는 상설공연장 광화문아트홀에서 장구 사이에 섰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난장(亂場). 충남 조치원에서 충북 청원군 강내면을 끼고 청주 쪽으로 흐르는 미호천 물가 모래사장이 시끌벅적하다. 쌀 보리 콩 같은 곡물, 소 돼지 같은 동물, 다양한 산나물, 각종 옷감과 그릇, 일용품에 소금과 해산물이 그득그득 쌓인다. 한쪽에서는 소싸움과 닭싸움이 벌어지고, 씨름대회도 한창이다. 어디 순진한 사람 없나, 노름꾼에 야바위꾼이 몰린다. ‘고양이 뿔과 중의 상투도 살 수 있다’는 난장이 텄다. 곧 만 다섯 살이 되는 꼬마 김덕수(60·김덕수패 사물놀이 리더)는 한 어른의 어깨 위에 서 있었다. 그 어른은 다른 어른의 어깨를 밟고 서 있었다. 3m는 족히 넘는 곳에서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을 쳐다보니 참 좋았다. 1957년 9월 9일, 김덕수는 남사당이 됐다. 》
‘나는 집시의 피였다’-노천명 ‘남사당’ 중에서

1957년 9월 8일은 추석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대전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둘째 아들 덕수에게 주섬주섬 옷을 입혔다. “안 된다. 그거 시키면 애 팔자 다 망하는 거다”라며 어머니가 붙잡았지만 아버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길로 집을 나서 도착한 곳이 조치원이었다.

아버지가 몸담았던 남사당패에는 새미(어른 어깨 위에서 춤추는 무동)가 필요했다. 무겁지 않으면서 제 몸은 가눌 수 있는 아이. 김덕수가 딱 그 나이였다. 네댓 살 때 어머니가 하던 식료품 가게의 사과를 소리 내어 팔 만큼 또랑또랑했고, 소고(小鼓)를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으니 재주는 이미 갖춘 터였다. 그가 사내아이로 태어났을 때부터 남사당 어른들은 이날만 기다린 셈이었다. 그 다음 날 별다른 연습도 없이 바로 새미가 돼서 어른들 머리 위로 올라갔다. 이쪽 어른 어깨 위에 있다 맞은편 어른 어깨 위로 내던져지는 ‘던질사위’도 거뜬히 견뎌냈다. 울지도 않았고 겁도 없었다. “싫고 무서웠으면 안 했겠지요. 팔자소관이라고 하더라고요.”

남사당은 풍물(농악), 버나(사발 돌리기), 살판(텀블링 같은 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인형극)로 이뤄진 연희(演戱)단체였다. 전국을 떠돌며 추석 단오 백중 같은 날에 장이 서거나 난장을 튼 곳, 아니면 큰 마을을 돌며 재주를 선보이고 대가를 받았다. ‘천한 것들’이라며 얕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당대 우리 문화의 숨겨진 예인(藝人)들이 자신의 기예를 멋들어지게 드러내는 곳이었다.

코흘리개 김덕수에게는 살아 있는 교실이었다. 하루 종일 보고 듣고 따라 했다. 상모돌리기는 기본이었고 벅구(소고)부터 시작해 장구 꽹과리 북 징, 지금의 사물(四物)을 다 배웠다. 살판 하던 어른들이 쳐놓은 줄이 놀이터였고 덜미에 쓰이는 인형을 들고 인형놀이를 했다. 소리며 재담, 비나리도 줄줄 입에 붙었다. 따로 시간을 내서 일대일로 배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2년이 채 안 돼 “남사당에 신동 났다”는 소문이 전국의 풍물패와 농악대에 퍼졌다. 당시 동아일보는 한 농악대회에 나온 그를 “일당백(一當百)의 수훈”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남사당에게 유랑은 천형(天刑)이었다. 짐을 풀면 그곳이 숙소였고, 짐을 싸면 길을 떠났다. 남사당은 계절을 불문하고 대부분 걸어 다녔다. 어른들 등에 업혀 다녔음에도 그때의 추위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추웠어요. 굉장히 추웠어요. 파주 일대를 도는데 임진강이 꽁꽁 얼었던 기억이 생생해요.” 1960년대 초반, 한 마을에 들어가서 판을 벌이려고 했다. 보통은 남사당패의 화주(化主·총무 격)가 마을의 이장과 공연 일정 등을 상의해서 결정한다. 그러나 퇴짜를 맞았다. 굿을 한다고, 미신이라고. 패거리는 달빛 아래 밤이슬을 맞으며 다른 마을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갈수록 그런 일이 늘어만 갔다.

어린 프로페셔널

1964년 남사당패는 마지막으로 포장굿을 쳤다. 포장굿이란 말뚝을 둥그렇게 박고 광목으로 휘감아 놓은 뒤 그 안에서 돈을 받고 벌이는 공연을 말한다. 가설극장이라고도 했다. 이미 독일(당시 서독)에서 온 서커스단이 서울에서 공연을 몇 차례 했던 직후였다. 사람들은 줄 위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외국인 곡예사에게 열광했다. 또 TV가 생겨서 번듯한 인형극이 등장했다. 천 뒤에서 꼭두각시 인형을 손으로 잡고 벌이는 남사당 덜미는 촌스러워 보였다. “남사당의 생명력이 마지막까지 온 거였죠.”

그 무렵 남사당은 온갖 기예를 다 갖춘 김덕수의 판이었다. 장구며 벅구며 상쇠놀이며 ‘열두 발 상모’가 그의 독무대였다. 당연히 어린 그는 다른 어른과 똑같이 한 몫의 행하(行下·출연료)를 받았다. 남사당은 분배가 확실했다. 돈이든 쌀이든 양초든 실이든 받은 것은 일하는 만큼, 능력만큼 나눠줬다. 기예를 더는 보이지 못하는 사람이나 짐을 들고 다니는 ‘탁자’에게는 밥만 먹여줬다. 각 연희의 선임 격인 뜬쇠는 보통 두 몫을 받았고, 세 몫을 받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아무 불만이 없었지요. 꼬마 덕수를 모두 인정했으니까.” 그는 프로페셔널이었다.

그의 프로페셔널 기질은 1960년대 중반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당시는 6년 과정)를 다닐 때 경험한 리틀엔젤스 활동에서 잘 드러났다. 세계를 돌며 예술 공연을 펼쳐 민간외교사절로 이름을 높이던 리틀엔젤스가 그를 스카우트했다. 외국인들이 열광하는 설장구, 상모돌리기 같은 전통예술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는 단원이자 다른 단원을 가르치는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점잖게 협상을 했지요. 나는 선생이자 단원인데 다른 애들과 똑같이 취급하면 안 된다. 두 몫은 못 줘도 ‘한 몫 반’은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이지요.” 그는 다른 어른 지도자와 같은 수준의 봉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학생들을 보거나, 공연을 보러 온 아이들을 보면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슬퍼할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에 적은 두고 있었지만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하느라 출석일수는 한 해 50일도 안 됐다. 결국 3학년 때인 1961년 초, 무단결석을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그러나 그해 9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충남대표로 나가 개인 최고상을 받자, 당시 충남도지사가 복학을 시켜줘 겨우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사람들에게는 천하다고 잘못 알려진 세계로 간 순간, 다른 아이들하고는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 거였어요.”

영혼의 뿌리, 남사당

뜻밖이었다. 가장 좌절했을 때를 묻자 김덕수는 “지금 아닌가?” 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4년째 서울 종로문화체육센터의 광화문아트홀에서 전통연희상설공연 ‘판’을 해오고 있다. 무속 판소리 사물놀이 연희를 주축으로 하는 ‘100% 전통’ 공연이다. 남사당을 현대로 끌어온 셈이다. 월요일과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무대에 공연을 올린다. 그러지 않고서는 수지를 맞출 수가 없다. “여기도 지금 오기로 버티고 있어요. 어디서도 지원해주지 않고….” 우리 것을 하는 후학들에게 꿈을 확실히 심어줄 수 있는 뭔가를 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무대에 선 지 55년, 사물놀이라는 희대의 걸작품을 토해낸 지도 34년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사물놀이는, ‘우리 것’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어느 것 하나 안정된 것이, 뿌리내린 것이 없다. 아직도 세계에 우리 것의 위대함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게 지금의 한류는 한류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어요. 아직도 개척할 게 많고, 자꾸 정열을 가지고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말이죠.”

올해 환갑을 맞는 그는 연주를 하지 않으면 진짜 병이 난다고 했다. 자신의 생체리듬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남사당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그 신명에 빠져 있기 때문이란다. “하면 할수록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야릇한 맛을 새롭게 느끼고 있어요.” 김덕수의 ‘유랑’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