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헤이리 이안수 씨의 게스트하우스 ‘모티프원’

입력 | 2012-03-03 03:00:00

서재에 둘러앉아 밤새 얘기하며 세상 한바퀴…




“네가 보는 책들, 한 권 한 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 후에 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 때마다, 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

-‘바람의 그림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그의 서재에는 책만 꽂혀 있는 게 아니었다. 1만2000여 권의 책 사이 곳곳에는 그동안 스쳐지나간 많은 이들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누군가가 태우려고 가져 왔다가 그냥 꽂아놓고 간 일기장, 10년 뒤 펼쳐보겠다며 꿈을 적어 놓은 대학 초년생들의 쪽지, 출판관계자와 저자들의 자필 기록이 담긴 책들까지. 서재는 마치 영혼의 양분을 찾아 뻗어나간 나무의 뿌리처럼 모든 걸 얼기설기 엮고 있었다. 그 나무를 키우는 이는 서재가 있는 게스트하우스 ‘모티프원’의 주인장 이안수 씨다.

○ “내가 갈 수 없으니 그들이 오게 해야죠”


모티프원은 파주의 예술가 마을 헤이리에 있다. 여러 해외 매체들에 소개가 되었는지라 지금도 국내뿐 아니라 해외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동안 세계 50여 개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이 묵었다. 주로 예술과 문화를 좋아하거나, 직접 업으로 하는 이들이었다.

많은 투숙객들은 서재에 모여 밤늦도록 대화를 나눈다. 대화는 그날 묵는 사람들에 따라 가지각색의 다양한 주제로 채워진다. 물론 그 중심에는 이안수 씨가 있다. 오로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하니, 하얀 수염을 기다랗게 기른 그의 외모가 영락없는 ‘이야기 도사’ 그 자체란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이들의 수많은 사연은 그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남는다. 그리고 그의 내면세계에서 잘 섞이고 다듬어져 다음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꺼내어진다. 어떤 이에게는 아픔이었던 추억이 다른 사람에게는 감동이 되고 그의 미래와 삶을 바꾸는 힘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 사람보다 흥미로운 것은 없어요.”

이 씨는 여행이란 풍광이 좋아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세계 각국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접하는 것보다 더 값진 인생의 경험은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 씨는 25년 동안 책 관련 일을 했다. 여행을 좋아해 많은 날들을 길 위에서 보냈다. 그러다 늘 여행을 다닐 수는 없는 현실 때문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세상의 사람들을 맞이하기로 했다. “내가 갈 수 없으니 그들이 오게라도 해야죠.” 모티프원이 탄생한 배경이다.

그는 문득 서재의 수많은 책들 가운데 가장 아끼는 것이라며 방명록을 꺼내 보였다. 방명록은 한두 권이 아니었다. 그림체만 보아도 누구인지 알만한 예술가들의 낙서부터 보통 사람들의 넋두리까지 다양한 흔적들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합심이라도 한 듯 모여 정성껏 만들어낸 방명록이 또 있을까. 그들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모티프원에서의 하룻밤이 더욱 궁금해졌다.

이야기는 저녁 무렵 서재에서 시작됐다. 내 아내는 아이들을 재운 후 내려왔다. 밤에는 퇴근한 이안수 씨 부인까지 야식을 들고 합류했다. 이야기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많이 웃고, 때로 진지해졌다. 성토하는 분위기로 갔다가는 어느 새 가슴 시린 이야기를 나누며 고개를 끄떡였다. 마치 세상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정말 무슨 말들을 그토록 오래 했는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날 줄 몰랐다.

○ 내 글·그림이 누군가에게 생기를 주길


천창으로 내리쬐는 아침 햇살에 방에서 눈을 떴다. 넓은 창 밖으로 낮은 산과 아직 앙상한 나무들이 한껏 가지를 펼치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창가에 놓인 책상에 앉았다. 창 앞의 하얀 자작나무 가지가 파란 아침 하늘로 인해 더욱 새하얘진 느낌이었다.

책상에 놓인 방명록이 보였다. 나는 전날 이곳에서 잤던 사람의 글을 읽었다. 그리고 이전 사람들의 글을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같은 장소에서 적어 내려간 다른 이야기들은 누군가에게 고백을 하듯 때로는 진솔했고, 때로는 편안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가장 최근 페이지까지 읽은 후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본다. 시간은 다시 현재. 자작나무가 보인다. 빈 페이지를 펼친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하얀 종이가 나를 본다. 나는 그 곳에 자작나무를 그리기 시작한다. 영혼의 일부를 담는다. 내 그림이, 내가 끼적거린 글이 훗날 서재 어딘가에 꽂히고, 누군가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 넣어줄 거라 생각하며, 나는 내게 주어진 한 장을 천천히 채워 나갔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