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여자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남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연애의 진행에 따라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보았을 때다. 여기서 ‘진짜 얼굴’이란 민낯이 아니라 ‘웃는 얼굴 속에 숨겨 두었던 성격’을 의미한다. 여자를 잘 모르는 남자, 특히 마초 성향일수록 환상을 품는 경우가 많다. 그녀를 자기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그녀는 애교와 배려심, 인내로 참아온 것뿐이다.
연애가 초기 관문을 지나 일상으로 접어들 즈음이면, 웬만한 인내는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환상은 비로소 종말을 고하게 된다. 소중하게 키워온 환상이 깨지는 순간을 기뻐할 남자는 없다.
그녀가 싫어서가 아니다. 사랑엔 변함이 없다. 즐거운 연애가 끝나고 혹독한 인생이 시작될 것이란 두려움에 압도당할 뿐이다. 특히 여성이 독립적이지 못할 경우 ‘툭’ 소리는 매우 작게 들리는 반면에 책임감은 바위보다 크게 느껴진다. 물론 도망 충동을 억제함으로써 남자의 사랑은 친밀의 수준을 벗어나 책임감으로 성숙된다.
세 번째는 그녀가 ‘틈’을 주지 않을 때다. 그녀의 ‘남편 관리’가 적정선을 넘어 포위망처럼 좁혀져 올 때 남자들은 부담스러움과 후회의 경계에서 고민하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다는 것을 남자들도 안다. 세상살이가 불안해서 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원하는 대로 해주려고 한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그만의 숨 쉴 틈’ 역시 필요하다. 여자들이 누군가와 수다를 떨거나 오랫동안 전화 통화를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봐도 좋겠다.
세상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고도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개인주의에 여성권력 부상과 가부장제의 위기, 세대 대결 양상까지…. 그런 배경 속에서 남녀 관계 역시 고통스럽게 진화하는 중이다.
요즘 남자들, 과거 세대만큼 믿음직스럽지 못하며, 잘나가는 여성의 눈높이로 보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는 게 사실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건, 앞으로 계속 그럴지도 모른다는 부분이다.
한상복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