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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를 들고]10개월 병원 돌며 검사 할머니… 우울증 치료 권하자 “나는 멀쩡”

입력 | 2012-03-05 03:00:00


이동우 인제대 의대 교수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신건강의학과에 70대 후반의 할머니가 가족의 손을 잡고 왔다.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했다. 목은 앞으로 구부러져 힘이 없어 보였다.

이분은 사는 게 아무 재미가 없고, 소화도 안 되고 입맛도 없고, 잠은 안 오고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면서 기운이 하나도 없다고 호소했다.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였다. 문제는 이런 증상을 보인지가 열 달 가까이 됐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오래전 가까운 병원을 찾아가 온갖 검사를 다 했지만 검사 결과는 다 정상이었다고 했다. 소화가 안 되고 여기 저기 아픈 증상에 대해 치료도 받았다고 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다가 한 곳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권유받았으나 “나는 정신이 멀쩡하다”고 본인이 펄쩍 뛰는 바람에 시간만 지나간 셈이다. 결국 병세가 더 악화돼 가족의 강권으로 필자에게 오게 됐다.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에서 흔히 벌어지는 광경이다. 노인에게 이런 경향이 더 심하지만 젊은 연령층도 마찬가지다. 정신질환을 앓으면서도 정신질환인지 모르거나 남들이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봐 치료를 망설이다가 병을 키워서 뒤늦게 치료를 받는 사례가 흔하다. 문제는 이렇게라도 치료를 받는 환자보다 아예 치료를 받지 않는 환자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보건복지가족부의 ‘2011년 정신건강 실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27.6%가 평생 한 번 이상 정신질환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 중에서 한 번이라도 정신건강 전문가에게 상담이나 치료를 받는 사람은 15%에 그쳤다. 85%는 방치되는 셈이다.

사실 이런 연구 결과가 새삼스러운 내용은 아니다. 2001년과 2006년 복지부 지원을 받았던 조사에서도 정신질환의 유병률은 높지만 치료율은 낮게 나왔다. 참으로 아쉬운 점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이 미흡하다는 사실이다.

몰라서 못하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알고도 안 하는 것은 큰 문제다. 심각한 사태임을 파악한 지 오래인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 따르지 않는 상황, 정책결정의 우선순위에서 정신건강의 문제가 후순위로 밀리는 상황이 참으로 안타깝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을 제고할 대대적인 국민계몽과 교육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누구나 불이익을 걱정하지 않고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라”고 최근 정부에 요구했다.

세계 10대 무역국인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 자살률로 더는 국격을 손상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 정신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범정부적인 노력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이동우 인제대 의대 교수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