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년) 중에서 》
브래드 피트는 너무 잘생겨서 많이 손해 보는 남자다. 이번 오스카 때문에 하는 소리는 아니다. ‘머니볼’의 고갱이는 뜨듯한 스토리였지 연기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벤자민 버튼은, 브래드 피트를 관입시킨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은 소설이라기보다 괴담이다. 브래드 피트라는 존재 덕에 데이비드 핀처는 그 복잡 야릇한 이야기를 초지일관의 고집 센 러브스토리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거꾸로 살든 다시 살든 인간에게 평생 허락된 사랑의 시간은 한 번의 찰나뿐이라는 멍청한 고집. 조니 뎁이나 주드 로로는 납득시키기 곤란한 주제다. 머리에 기름칠을 하고 태양신의 목을 날려버려도 느끼하다 욕먹지 않는 아킬레스만이 받아들 만했다.
벤자민 버튼으로부터 3년을 덧입은 ‘머니볼’의 피트는 초상화의 이지러짐을 처음 눈치챈 도리언 그레이처럼 보였다. 희미하지만 복구할 수 없는, 퇴락의 기미.
초상화 중심의 광채가 흐려지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에 놓쳤던 배경 요소들이다. 기껏 여백 메움이었기에 곱씹을 만큼 넉넉하진 않다. 케이트 블란쳇의 교통사고를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슬로 복기하는 부분 정도가 그나마 풍성하다.
파편 같은 장면들에 꾸역꾸역 밀어 넣은 언어가 다시 볼수록 그래서 아쉽다. 핀처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린 노인’ 벤자민 버튼을 바다로 데리고 나간 선장이 덧없이 삶을 맺으며 허겁지겁 남기는 긴 유언도 그렇다.
“받아들여야 해.”
짤막한 등장 내내 열심히 유쾌함을 가장하던 그가 고해하듯 납득의 섭리를 쏟아내며 절명하는 장면은 ‘돈키호테’의 임종과 닮았다.
돈키호테는 기사 수행을 떠나 처음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은 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곧 병들어 죽는다. 꿈에 대한 자부심이 자신을 조롱하기 위한 사람들의 장단 맞추기에서 비롯한 것이었음을 눈치채버린 거다. 어떻게 더 살겠나. 돈키호테라 스스로 이름 지었던 알론소 키하나는 회개하듯 유언하고 서둘러 숨을 거둔다.
세르반테스는 다른 작가가 멋대로 속편을 쓴 걸 참지 못하고 본편 10년 뒤 속편을 내 온전한 비극을 종결지었다. 그리고 작가도 곧 죽었다.
그가 지금 되살아나 뮤지컬을 본다면 다시 스스로 분노의 각색에 나설지도 모르겠다. 저작권 소송을 할지도.
뮤지컬은 ‘이룰 수 없는 꿈’과 ‘닿을 수 없는 별’에 도전하기를 선동한다. 그런 삶. 좋기만 한 걸까. 발성 기본은커녕 음정에 대한 염치까지 모른 채 “가수만이 내 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TV에 넘쳐나는 까닭이다. 꿈으로 설득된 환상을 선동하는 주체로 혐의를 둘 대상은 많다. 다수가 발휘하는 맹목의 에너지가 발생시키는 떡고물은 경제적 가치가 충분하므로.
고도(Godot)는 오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기다림에 고착돼 그것이 유일한 삶의 버팀대가 된 사람들이다. 버팀대는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들은 고도를 안다. 안다는 것은 지나보냈다는 것이다. 지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남은 할 일이 그뿐일 따름이다.
찰나의 한 번뿐인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다. 거꾸로 살든, 다시 살든.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앞을 보는 것이다. “뒤에는 꿈이 없”(데라야마 슈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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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ag 동아일보 기자. 대책 없이 늦된,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