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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하태원]김진표의 ‘생존 정치’

입력 | 2012-03-10 03:00:00


김영삼(YS) 정부 최대 치적으로 꼽히는 금융실명제는 발표 직전까지 YS를 포함해 10여 명만 알았던 극비 사안이었다. 1993년 7월 재무부 주무팀은 해외출장을 가장해 과천 주공아파트 505동 304호의 아지트로 몸을 숨겨 작업했다. 이곳 현장팀장은 김진표 당시 재무부 세제심의관이었다. 김진표는 승승장구했다. 김대중 정부 때 재정경제부 차관과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을, 노무현 정부에서는 경제 교육 2개 분야의 부총리를 각각 지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를 대통령직인수위 부위원장으로 발탁하면서 “내가 아는 가장 유능한 공무원”이라고 극찬했다.

▷관료 시절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일을 똑 부러지게 하면서 부하들에게는 정(情)이 넘치는 인물로 기억한다. 말이 장황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속이 깊고 의리가 있어 사람의 마음을 금방 사로잡는다. 2004년 총선 때 경기 수원 영통에서 처음 출마한 김진표는 재선을 했고 지난해 5월엔 민주당 원내대표 자리에 올랐다. 내달 총선에서도 민주통합당 후보로 3선(選)에 도전한다.

▷순항하던 김 대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앞두고 여야가 대립하면서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을 겪는다.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를 문제 삼아 FTA 폐기를 주장하는 민주당 내 강경파를 겨냥해 “FTA 내용도 모르면서 여당에 짓밟히는 ‘쇼’ 한번 하자는 것”이라고 작심발언을 했다. 이 때문에 정체성 논란에 휩싸이며 공천탈락 표적 1호가 됐고 “새누리당 X맨 아니냐”는 조롱을 받았다. 살생부에 오르내렸던 쓰라림 탓인지 김진표 입에서 더는 FTA 불가피론이 나오지 않고 “발효를 강행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재협상 투쟁에 나서겠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평화를 위한 예방적 군사기지’로 추진한 제주 해군기지에 대해서도 “즉각 공사 중단”을 외쳤다. 동아일보는 그가 원내대표로 선출될 당시 사설을 통해 “나라살림을 튼튼히 하고 민생경제를 살리려던 초심(初心)으로 건전한 중도세력이 민주당의 중심이 되도록 하라”고 주문했지만 이제 공염불이 된 것 같다. 그를 아꼈던 한 전직 경제부총리는 “정치판이라지만 너무하다. 소신을 굽히면서까지 의원직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눈물겹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아남자면 별수 없겠지만 그의 모습이 구차해 보인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