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땅 청소년에 ‘사커 드림’ 선물… “그라시아스 SK”
지난달 1일 에콰도르 에스메랄다스 시 축구 경기장에서 이데르 마르티네스 군(왼쪽 사진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과 같은 고등학교 친구들이 SK건설이 제공한 경기복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 SK건설은 축구를 통해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난해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한 ‘코파 SK’ 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오른쪽 사진은 같은 날 에스메랄다스 시 하이메 우르타도 곤살레스 초등학교에서 직원들과 함께 학생들에게 학용품 세트를 선물하고 있는 심완식 SK건설 현장소장(오른쪽). SK건설 제공
○ 어두운 유혹에 빠지지 않게
SK건설 관계자는 “회의를 거듭하며 고민하다 프로 팀을 후원하는 것보다 마약 등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가난한 청소년들이 건전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게 더 값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려 코파 SK를 개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행정업무를 맡고 있는 현석호 SK건설 부장은 “일정은 이미 잡혀 있는데 진척이 더뎌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며 “개막전 닷새 전에야 가까스로 아이들에게 경기복과 축구화를 나눠줄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SK는 이 밖에도 축구공과 보호대 등 총 1억3000만 원 상당의 축구용품을 지원했다.
코파 SK를 ‘축제’로 만들기 위한 흥행몰이에도 애썼다. SK는 TV와 냉장고, MP3플레이어 등 다양한 경품으로 지역 주민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8월 열린 결승전은 1만 명이 넘는 관중이 몰린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인구 30만 명의 작은 도시에서 거대한 축제의 장(場)이 펼쳐진 것이다.
○ 가장 낮은 곳에 손길을 뻗다
에콰도르는 남미에서 손꼽히는 산유국이지만 주변 나라들보다 훨씬 가난하다. 최근 10년간 대통령이 8번이나 바뀔 정도로 정치 불안이 지속된 탓에 체계적으로 경제개발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SK건설이 국영 정유공장 개보수를 위해 2009년 진출한 에스메랄다스 시는 이 나라에서도 가장 소외된 곳이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1800년대 초반까지 이곳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배로 실어 나르던 노예 항구였다. 이런 영향으로 에스메랄다스 주민 상당수는 오랫동안 차별을 받아온 흑인이다. 한 현지 주민은 “각종 오염시설이 에스메랄다스에 몰려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SK건설 관계자는 “총기가 넘쳐나다 보니 외국인이 탄 차량에 총을 쏘고 돈을 빼앗아가는 무장 강도가 적지 않다”며 “휴일에도 시내로 못 나가고 안전이 보장된 숙소에서 ‘창살 없는 감옥’처럼 지낼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행정력이 구석구석에 미칠 수 없다 보니 생활 여건도 열악하다. SK건설 직원들은 샤워를 할 때 반드시 입을 꼭 다문다. 수질오염이 심해 어떤 병에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한 직원이 물을 잘못 마신 뒤 병균에 감염돼 큰 수술을 받기도 했다.
SK는 이런 ‘극한의 땅’ 에스메랄다스에 손을 내밀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먹튀’ 오해 벗고 하나로
하지만 사업 초기 SK건설을 힘들게 한 것이 주변 환경만은 아니었다. 외세에 배타적인 노동계 등 일부 주민들로부터 ‘먹튀 자본’으로 오해받은 것은 참기 어려웠다. 미국, 유럽 등 서구 오일 메이저들로부터 석유자원을 수탈당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SK건설은 또 하나의 먹튀 자본으로 비쳤던 것이다.
SK건설은 사무실과 공사장에 현지인 1000명가량을 고용해 이 지역 실업난 해소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장애인 7명을 청소원 등으로 채용하고, 수도 키토에선 정부에 장애인 전용버스를 기증하기도 했다. 차츰 현지인들도 꼭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었다. 에르네스토 에스투피냔 킨테로 에스메랄다스 주지사도 SK건설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 “국가도 해주지 못한 것을 SK가 챙겨주고 있다”며 높게 평가했다.
SK건설은 순직 경찰 유가족 돕기에도 열심이다. 매년 말 생활필수품을 지원하는가 하면 생계가 막막한 유가족을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공사현장 근처 직원 숙소에서 만난 타티아나 테노리오 라스파르 씨(35·여)는 기자가 남편 얘기를 꺼내자마자 눈물을 쏟아냈다. “정말 믿음직한 경찰이었는데…. 서른아홉이던 2009년 4월 심근경색으로 저와 네 자식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갔어요.”
근무 중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부 보상금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라스파르 씨는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뭐든 해야 했다. 휴가철 해변 식당이 대목을 맞을 때 설거지를 도와주고 하루 30달러를 받았다. 하지만 일거리가 항상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정도로는 생활비를 대기도 버거웠다. 실업률이 70%를 넘어 팔팔한 20대 청년실업자들이 부지기수인 이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이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미쳤다. 에스메랄다스 경찰청으로부터 라스파르 씨의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SK건설이 그를 직원 숙소 청소부로 특별 채용키로 한 것이다. 라스파르 씨는 “SK가 나와 내 아이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며 “착실히 돈을 모아 아이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 “SK는 고아들의 엄마 - 아빠” ▼
“에세카 에스 누에스트로 부엔 아미고. 그라시아스 SK(당신들은 좋은 친구예요. 고마워요 SK).”
지난달 1일 하이메 우르타도 곤살레스 초등학교. 욜란다 오르티스 게바라 교장과 30여 명의 학생이 심완식 SK건설 현장소장 등 일행을 반기며 이렇게 외쳤다. 방학인데도 학생들은 대부분 교복 차림이었다. 게바라 교장은 “가난한 아이들이 마땅한 옷이 없어 SK가 마련해준 교복을 외출복으로 즐겨 입는다”고 설명했다.
SK건설은 정유공장 개보수 공사 현장 주변에 있는 이 학교를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학교 담벼락을 세우고,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고치고, 식당을 지어줬다. 조잡한 나무의자는 플라스틱 책걸상으로 교체했다. 책걸상이 부족해 입학하는 학생들이 직접 의자를 갖고 와야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게바라 교장은 “학생의 절반가량이 고아 또는 이혼한 한부모 가정의 자녀들”이라며 “이것저것 챙겨줄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에게 SK건설은 부모와 같은 존재”라고 고마워했다.
심 소장은 이날 학생들에게 연필, 색연필 등 각종 학용품을 선물했다. 그러자 이제 갓 열 살을 넘긴 어린 학생들은 ‘마림바’ 공연으로 답례를 했다. 마림바는 에콰도르 주민의 선조들이 과거 노예 신분으로 아프리카에서 건너올 때 들여온 격렬한 리듬의 전통 민속춤이다.
학교 관계자는 “SK건설 직원들이 학교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이 1주일 전부터 자발적으로 연습했다”고 전했다. 흥이 무르익자 교장과 심 소장을 포함한 SK건설 직원들도 학생들의 손에 이끌려 무대에 올라 함께 어울렸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에스메랄다스 지역 일간지 라호라의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기자는 “지금껏 본 마림바 중 가장 의미 있는 공연”이라고 말했다.
심 소장은 학생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며 “과거 한국 학생들도 정말 어렵게 공부하던 때가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 이 나라를 이끌 인재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당부했다.
에스메랄다스(에콰도르)=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