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기요모리 붐
올해 대하드라마의 새 주인공으로 발탁된 인물은 헤이안시대 말기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을 세운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1118∼1181)다. 과거에 나왔던 책이 다시 인쇄되고 서점가에 별도 코너가 만들어지는 등 출판계에는 기요모리 특수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하층 무사였던 기요모리는 미나모토 요시토모(源義朝)와 함께 중앙정치의 권력투쟁에 개입한 뒤 1156년 파벌 간 전쟁에서 이기면서 확고한 실력자로 떠오른 인물이다. 3년 뒤에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요시토모까지 제거한 뒤 일왕을 유배 보내고 스스로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오늘날의 총리)에 올랐다. 이후 딸을 80대 일왕의 부인으로 들여보낸 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세 살짜리 외손자를 일왕에 앉히는 등 전권을 휘둘렀다. 당시 “다이라(源) 일문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독재정치를 펼쳤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사(正史)였다.
기요모리의 인간성도 다시 평가받고 있다. 1180년 ‘겐페이갓센(源平合戰)’에서 다이라노 일족을 멸하고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바로 기요모리가 살려준 요시토모의 아들로 기요모리의 두터운 인간미가 화를 자초했다는 주장이다. 사학자인 우에스기 가즈히코(上彬和彦) 메이지(明治)대 교수가 펴낸 ‘역사에 배신당한 무사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기요모리가 악역으로 그려진 것은 미나모토 천하가 된 후 나온 고전문학 ‘헤이케 모노가타리(平家物語)’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치과의사이자 사상가인 나가야마 야스오(長山靖生)는 ‘신서로 명저를 이해하는 헤이케 모노가타리’에서 무능한 정치가, 귀족적 관료 시스템의 부패, 말만 요란한 지식인과 언론 등 현대사회의 축소판을 담아내고 있다. 기요모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사료 부족 등 이유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현재의 필요에 의해 역사는 가공되고 재해석된다는 평범한 진실을 기요모리는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한일 간 역사는 어떤가.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