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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텅빈 무대… 꽉찬 상상… 모차르트의 “브라보”가 들려온다

입력 | 2012-03-20 03:00:00

■ ‘피터 브룩의 오페라 마술피리’ ★★★★




《 웬만한 오페라라면 터져 나올 법한 ‘브라보’ 같은 환호는 없었다. 젊은 성악가들이 최고음과 최저음을 넘나드는 음정을 제대로 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오페라라면 빠질 수 없는오케스트라도 없었다. 무대 위에 함께 등장한 한 대의 피아노 반주가 전부였다. 그 때문일까, 모차르트의 화려한 아리아가 마치 슈베르트의 담백한 독일가곡(리트)처럼 들렸다. 》

텅 빈 공간의 미학을 오페라에도 적용한 ‘피터 브룩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오른쪽)의 아리아로 유명한 ‘지옥의 복수가 내 가슴에 끓어오르고’가 울려퍼지는 장면. 히말라야 고봉 등정을 완수한 알피니스트가 다시 최소한의 장비에 의지해 무산소 등정 도전에 나설 때의 마음가짐이 느껴지는 무대였다. LG아트센터 제공

시각적으로 관객을 압도할 무대미술도 없었다. 황금빛 대나무를 닮은 10여 개의 나무 세트로 숲을 만들고 거대한 문을 만들고 웅장한 신전을 형상화하는 게 다였다. 조명도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사각 무대 꼭짓점에 위치한 4개의 기본 조명만 쓰다가 가끔 중앙의 조명 3, 4개로 약간의 각광 효과를 낼 뿐이었다.

짐작건대 어쩌면 최초의 오페라 무대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연출가나 공연장의 명성에 대해 ‘무지의 베일’을 쓴 채 작품을 접한 관객이라면 학예회 무대를 떠올릴 법했다. 만일 대학로의 젊은 연출가가 이런 무대를 선보였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아니 이런 식의 오페라 연출이 가능하기나 할까. 15∼17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피터 브룩의 오페라 마술피리’는 현존하는 연출가로서 최정상에서 선 피터 브룩(87)이기에 가능한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화려한 꽃의 시절과 풍요한 결실의 계절을 다 보낸 노대가의 ‘겨울 나목(裸木)의 미학’은 이미 2010년 연극 ‘11 그리고 12’의 내한공연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이야기의 원초적 매력이란 줄기와 이를 풀어내는 배우들의 화술이란 가지를 빼고 잎과 꽃은 대부분 관객의 상상에 의탁하는 무대 연출이다. 이런 ‘비움의 연출’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모차르트 최후의 오페라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마술피리’는 환상과 상징으로 가득한 오페라다. 편력의 길을 떠난 타미노 왕자가 이교도에 납치된 파미나 공주를 구하기 위해 침묵의 시련, 불의 시련, 물의 시련이란 3중의 시련을 이겨낸다는 환상적 영웅담을 토대로 보수적 가톨릭 세계관에 맞섰던 프리메이슨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파미나 공주의 어머니로 희생자연(然)하는 ‘밤의 여왕’이 기독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제국주의를 상징하고 그 대척점에 선 자라스트로는 니체의 자라투스트라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 배화교 창시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때문에 현대로 올수록 이 작품의 우화적 환상성이나 정치적 상징성에 초점을 맞추는 오페라 연출이 많았다. 브룩은 이를 뛰어넘는 초월적 지혜에 초점을 맞췄다. 그것은 “사랑은 시련을 통해 단단해지고” “세상은 남자가 다스리지만 남자는 여자의 다스림을 받아야 행복”하노니, “남편과 아내, 아내와 남편은 신성에 도달하리라”라는 노랫말에 초점을 맞춘 연출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오페라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운명적 사랑을 나누는 타미노와 파미나 커플이 아니라 세속적 사랑을 꿈꾸는 파파게노와 그에게 사랑의 진가를 일깨워주는 파파게나 커플이라고 할 수 있다. 오페라 원작에서 파파게나는 노파로 등장했다가 젊은 처녀로 변신한다. 브룩은 꼬부랑 할머니 행세를 하던 파파게나가 두건을 벗고 등장할 때도 ‘젊은 할머니’라는 반전을 가미해 웃음을 안겨줬다. 또한 밤의 여왕과 악당 모노스타토스가 파멸하는 대단원을 용서와 화해의 장면으로 바꿔치기했다. 이 작품을 끝으로 30여 년간 자신의 예술적 둥지로 삼았던 뷔페 드 노르 극장의 예술감독에서 물러난 노대가의 예술적 자부심과 더불어 인생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무대였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