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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의 새벽편지]울지 말고 꽃을 보라

입력 | 2012-03-22 03:00:00


정호승 시인

서울 영등포 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주머니한테 꽃대가 막 올라온 작은 수선화 화분을 한 개 샀다. 비닐봉지에 넣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올봄에는 내 손으로 수선화를 피워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동안 사는 데 너무 바빠 내 손으로 꽃 한 송이 키워 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수선화는 며칠 안 가 여린 꽃대를 쭉 밀어 올리며 활짝 꽃을 피웠다. 연노란 꽃빛이 어둡고 좁은 방 안을 한순간에 환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이 주변을 이토록 아름답게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이토록 꽃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는 수선화가 핀 것을 보고 나에게도 이제 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워 버렸다. 꽃이 피기 때문에 봄이 온 것이 아니라, 봄이 왔기 때문에 꽃이 핀 것이다. 내 손으로 꽃을 피운 게 아니라 꽃은 자기 스스로 피어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한순간이나마 본질과 현상이 전도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젠가 육필시 10여 편을 출판사에 보내야 할 일이 있었다. 열심히 써 보았지만 글씨가 잘 써지지 않았다. 파지만 자꾸 나고 육필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따뜻함이나 아름다움이 잘 표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저것 펜을 바꾸어 보았다. 혹시 펜을 바꾸면 글씨가 더 좋아질까 싶어 내가 지닌 만년필을 다 꺼내 번갈아 가며 써 보았다. 그러나 펜을 바꾸었다고 해서 글씨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펜이라는 도구를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니라 내 글씨체를 바꾸어야 하는 거였다.

꽃은 시들지언정 자신은 안버려

한번은 원고가 잘 써지지 않아 노트북을 바꾼 적도 있다. 노트북이 너무 구형이라 자판을 쳤을 때 손가락 끝에 전달되는 느낌이 갈수록 둔탁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노트북으로 글을 쓰다간 쓸 수 있는 글도 제대로 못 쓰겠다 싶어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노트북을 바꾸었다고 해서 원고가 잘 써지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본질에 있었다. 본질이 변해야 현상이 변할 수 있는 거였다. 그런데도 나는 본질의 변화에는 무관심한 채 외양의 변화만 추구한 거였다. 이는 자신은 변하지 않고 남이 변하기만을 바라는, 자신은 탓하지 않고 남만 탓하기를 즐기는 삶의 태도다. 문제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변해야 남이 변하고, 속이 변해야 겉이 변한다.

올봄에 나는 본질과 현상이 전도되고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는 삶의 태도를 버리는 데서 봄의 의미를 찾는다. 봄이 왔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지, 꽃이 피기 때문에 봄이 온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지, 결혼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다. 국가와 국민이 있기 때문에 총선이 있는 것이지, 총선이 있기 때문에 국가와 국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수선화를 바라본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도 방황하지 않는 모습이다. 꽃은 꽃을 피우려고 애쓰지 않으면서도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피어난 그대로 방황하지 않고 열심히 산다. 누가 보든 말든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하늘을 향해 피어 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시들어 열매를 맺는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세계 불교계의 큰스님으로 존경받는 틱낫한 스님은 “한 송이 꽃은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꽃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의 존재 또한 그가 만일 진정한 인간이라면 온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말씀하신다.

꽃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아름다운 것이다. 무엇을 이루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피어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꽃은 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아니라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꽃은 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내가 사는 아파트엔 봄날에 가장 먼저 산수유가 피는데, 그 연노란 산수유도 꽃이 져야 붉은 열매가 익어 겨울엔 새들의 먹이가 될 수 있다.

내게 수선화를 팔던 아주머니는 말했다. 꽃이 지고 꽃대마저 시들면 화분에 흙을 수북이 덮어 놓으라고. 그러면 내년에 다시 구근에서 수선화 꽃대가 올라온다고.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동안 내 가슴속엔 내 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구근 하나 제대로 심어 둔 게 없었다. 그 구근이라는 본질이 있어야만 내 인생의 꽃도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

나부터 변해야 세상을 바꿀수있어

그 꽃은 굳이 만개하지 않아도 좋다. 꽃은 만개하기 직전이 더 아름답다. 인간의 만개는 오히려 오만을 부를 수 있다. 꽃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자신이 작고 볼품없는 씨앗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올봄에 우리에게 또 슬픔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꽃은 보도블록 사이에다, 지하철 계단 이음매에다 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것이다. 그러니 울지 말고 꽃을 보라. 꽃은 시들지언정 스스로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 자기의 향기조차 의식하지 않고 겸손히 살아간다.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