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민 소설가·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한 여자가 들어선다. 자연스레 눈길이 멈추는 여자다. 그 여자는 문 옆의 남자와 서로 가벼운 목례를 한다. 서로 잘 아는 것 같지는 않다. 남자와 반대편 벽에 붙어 선다. 이제 보니 남자도 꽤나 훤칠하다. 빨간 숫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이제 셋이 됐고, 직선을 그리는 점도 세 개가 됐다.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건조하고 조용하다.
“비가… 오데요?”
“아. 그래요? 차가 또 많이 막히겠네요?”
“네. 그렇죠?”
여자는 바로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남자 쪽을 향해 있던 고개가 다시 돌아간다. 직감적으로 남자가 교통체증 따위를 말해선 안 된다고 느꼈다. 그건 시선을 돌리는 여자의 움직임에서 느낀 아쉬움 때문만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말투 속에 있던 공백 때문이다. 그 여백이 담고 있던 건조함 때문이다.
평면에 있는 직선들은 단 두 가지 관계만을 가질 수 있다. 평행 혹은 교차. 평행한다면 서로 영원히 만날 수 없지만 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교차한다면 단 한 번 만나지만 그때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될 것이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무엇이 더 나은 걸까?
밖은 비가 오고 있을 것이다. 봄비다. 건조한 엘리베이터에서 비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빨간 숫자에서 시선을 떼고 눈을 감아본다. 바깥의 공기는 부드럽게 젖어있지만 습한 느낌은 없을 것이다. 바람은 아직 차갑지만 상쾌함을 담고 있다. 절로 심호흡을 하게 한다. 가슴 깊이 맑은 기운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기운을 따라 들어온 설렘이 가슴 깊이 퍼진다.
봄비에 설렘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공백에 스며든 습기 때문이 아닐까? 공기 중에 알알이 스민 습기는 때로 빛을 굴절시켜 예상치 못했던 아름다움을 허공에 그린다. 평행과 교차뿐인 그들의 관계가 수없이 변화하며 교차하고 포개지는 순간이다. 직선이었던 빛은 일곱 가지 색의 곡선을 그리고 그 끝은 희미해서 아득하다. 사람들이 봄비에 설렘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겨우내 경험하지 못했던 습기가 만드는 일상의 변화. 그 예상치 못한 굴절과 교차에 대한 소망.
저 두 분. 오늘 이 밤 부디 습하소서.
정재민 소설가·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