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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을 들며/정재민]봄비 내리면 왜 설레는 걸까

입력 | 2012-03-22 03:00:00


정재민 소설가·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건조한 엘리베이터 안이다. 퇴근 시간이 지난 화물용 엘리베이터는 더 넓고, 더 어둑하다. 엘리베이터에는 나와 다른 남자 둘뿐이다. 둘은 빨간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두 점이 직선을 그리며 수직으로 상승하는 것을 상상해본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한 여자가 들어선다. 자연스레 눈길이 멈추는 여자다. 그 여자는 문 옆의 남자와 서로 가벼운 목례를 한다. 서로 잘 아는 것 같지는 않다. 남자와 반대편 벽에 붙어 선다. 이제 보니 남자도 꽤나 훤칠하다. 빨간 숫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이제 셋이 됐고, 직선을 그리는 점도 세 개가 됐다.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건조하고 조용하다.

“비가… 오데요?”

여자가 말했다. 지극히 평범한, 아무 감정도 섞여 있지 않은 말투다. ‘1년은 365일입니다’보다도 평범하다. ‘4년에 한 번씩 366일이 된답니다’라는 말이 극적으로 들릴 정도다. 여자는 남자 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리고 있다. 완전히 고개를 돌리지는 않아 눈을 마주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남자가 말한다.

“아. 그래요? 차가 또 많이 막히겠네요?”

“네. 그렇죠?”

여자는 바로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남자 쪽을 향해 있던 고개가 다시 돌아간다. 직감적으로 남자가 교통체증 따위를 말해선 안 된다고 느꼈다. 그건 시선을 돌리는 여자의 움직임에서 느낀 아쉬움 때문만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말투 속에 있던 공백 때문이다. 그 여백이 담고 있던 건조함 때문이다.

평면에 있는 직선들은 단 두 가지 관계만을 가질 수 있다. 평행 혹은 교차. 평행한다면 서로 영원히 만날 수 없지만 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교차한다면 단 한 번 만나지만 그때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될 것이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무엇이 더 나은 걸까?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남자는 여자가 내리기를 기다린다. 여자는 남자와 같은 층인지 먼저 내린다. 그리고 남자가 뒤따라 내린다. 문이 닫히기 시작하고 내 눈에는 한 장면이 들어온다. 남자의 고개는 여자의 뒷모습을 향하고 있다. 그러고 이내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다 탁탁 두드린다. 그러고 고개를 조금 숙인 채 터벅터벅 여자를 뒤따라간다. 그들의 뒷모습이 더 궁금해지는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완전히 닫혔다.

밖은 비가 오고 있을 것이다. 봄비다. 건조한 엘리베이터에서 비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빨간 숫자에서 시선을 떼고 눈을 감아본다. 바깥의 공기는 부드럽게 젖어있지만 습한 느낌은 없을 것이다. 바람은 아직 차갑지만 상쾌함을 담고 있다. 절로 심호흡을 하게 한다. 가슴 깊이 맑은 기운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기운을 따라 들어온 설렘이 가슴 깊이 퍼진다.

봄비에 설렘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공백에 스며든 습기 때문이 아닐까? 공기 중에 알알이 스민 습기는 때로 빛을 굴절시켜 예상치 못했던 아름다움을 허공에 그린다. 평행과 교차뿐인 그들의 관계가 수없이 변화하며 교차하고 포개지는 순간이다. 직선이었던 빛은 일곱 가지 색의 곡선을 그리고 그 끝은 희미해서 아득하다. 사람들이 봄비에 설렘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겨우내 경험하지 못했던 습기가 만드는 일상의 변화. 그 예상치 못한 굴절과 교차에 대한 소망.

저 두 분. 오늘 이 밤 부디 습하소서.

정재민 소설가·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