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망울 가득한 고목 아래서 봄의 설렘에 젖다
이 나무는 다른 매화나무들과 달리 원통전 담장 옆에 홀로 떨어져 있어 전통 건축에 겹쳐진 고즈넉한 모습이 아주 일품이다. 백매화나무로 나이가 육백 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새하얀 꽃잎에 꽃받침의 색이 유난히 붉고 향이 짙어 개화기에는 나무의 연륜과 깊이를 한껏 느껴볼 수 있다. 각황전 담길의 홍매화와 함께 천연기념물 488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그런데 간혹 비슷비슷한 봄꽃이 너무 많아 꽃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곤 한다. 특히 복숭아꽃과 자두꽃, 벚꽃, 매화, 앵두꽃, 살구꽃 등은 꽃 모양새만 보고 나중에 어떤 열매가 맺힐 것인지 알아맞히기가 매우 힘들다. 이들은 모두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나는 장미목 장미과 나무의 꽃들이다.
○ 귀로 향을 듣는 꽃
매화는 예로부터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 중 하나였다. 추위 속에서도 고고하게 홀로 피어나는 모습은 고매한 기품으로 여겨져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시서화(詩書畵)의 주제로 즐겨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른 봄 매화를 찾아다니는 여행을 탐매(探梅)라 부르며 풍류로 즐겼다. 매화는 ‘귀로 향을 듣는 꽃’으로 불린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고요해야 진정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뜻인데, 그만큼 탐매 당시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에서 소란스러운 결혼식 분위기가 난다면, 고요한 산자락 고찰에서 만나는 매화는 수줍은 연인들의 언약식 같은 느낌을 준다고나 할까. 어찌되었든 나는 전남 순천의 선암사에서 그런 기분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었다.
○ 햇살이 매화나무를 간질인다
주차장에서 사찰의 일주문까지 걸어가는 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길로 익히 잘 알려진 곳 중 하나다. 그렇지만 아직은 방문객이 적어 마치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길인양 마음껏 여유를 부리며 걸었다.
이윽고 선암사 가람 사이를 지나 원통전 담장 옆의 매화나무에 다가섰다. 매화나무는 심어진 장소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깊은 애정을 주는 나무다. 이 나무의 이름은 선암매(仙巖梅).
안타깝게도 그 아래 섰을 때 아직 꽃은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나무를 올려다봤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꽃망울이 나무에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오랜 세월을 버티어 선 거대한 고목에 서린 비장함이 무척이나 깊게 느껴졌다. 매화가 가득했을 때나 푸른 잎이 무성했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쉬움보다는 설렘이 더 많았다.
인적 없는 산사의 조용함은 나와 선암매의 교감을 한층 돈독히 해 주고 있었다. 낮은 돌담 밑에서 배낭을 기대고 앉아 가지 사이의 파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봄빛 가득한 햇살 아래 피어오를 매화들을 상상했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