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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허승호]담합의 딜레마

입력 | 2012-03-24 03:00:00


피의자 A와 B를 검거했는데 범죄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 검사가 분리심문하면서 A에게 “자백하면 용서하겠지만 B가 먼저 자백하면 당신은 가중처벌”이라고 알려준다. 이런 상황에선 대개 먼저 자백하는 사람이 나온다. ‘죄수의 딜레마’다. 담합에 참여한 기업이 자진신고하거나 조사에 협조하는 경우 과징금을 감면해주는 ‘리니언시(Leniency·감경)’도 같은 원리다. 첫 번째 신고자는 완전 면제, 두 번째 신고자는 절반을 감경 받는다. 리니언시와 함께 ‘앰네스티 플러스’도 시행 중이다. A라는 담합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담합에 참여한 기업이 B라는 다른 담합 사건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면 두 사건 모두 처벌을 감면해주는 제도다.

▷라면값 담합이 9년 만에 적발됐다. 라면값이 매번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수준으로 오르자 공정거래위원회가 2002, 2004년 두 차례 조사를 벌였지만 증거 확보에 실패했다. 담합을 적발하기란 쉽지 않다. 담합의 결과로 참여자 모두 이익을 얻게 되므로 자백할 이유가 별로 없다. 하지만 리니언시가 도입되자 달라졌다. 2010년에 라면값 조사가 시작되자 압박을 느낀 한 업체가 먼저 자백한 것이다. “도대체 9년 동안 공정위는 뭐했느냐”며 질책할 수도 있지만 ‘고질적인 병폐가 리니언시 덕분에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현실 진단이다.

▷최근 휘발유 LPG 세제 설탕 밀가루 보험료 등에서 담합이 적발된 것도 리니언시 효과 덕분이다. 삼성과 LG의 세탁기 평판TV 노트북PC 가격담합도 마찬가지다. 리니언시가 도입된 후 담합 과징금 부과는 종전 연평균 13건에서 28건으로 배 이상 늘었다. 선진국들도 정부 감독 능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리니언시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담합을 일삼는 기업의 처지에서 리니언시는 눈엣가시 같은 제도다. ‘한 대기업이 여러 차례 감면 혜택을 받는 경우도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서로 다른 품목에서 해오던 그 업체의 여러 담합이 한꺼번에 적발되면서 생기는 일이다. 일각에서는 “리니언시 때문에 적발 낌새가 보이면 일부 기업이 먼저 신고하고 혼자 빠져나간다. 처벌 감경 폭을 줄이고 감경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담합 이탈자를 단속하고 싶은 담합 주도 기업이 들으면 딱 좋아할 만한 변설이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