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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철의 여인’과 ‘어머니’

입력 | 2012-03-28 03:00:00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지난 주말에 영화 ‘철의 여인’을 관람했다. 현대사에서 우파 진영의 뛰어난 리더로 꼽히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다룬 작품이다. 지난달 23일 개봉된 이 영화는 한 달 넘게 상영되고 있으나 관객 동원 실적은 저조하다. 이달 25일까지 누적 관객 수는 14만2000명에 그치고 있다. 개봉 이후 이 영화의 흥행에 도움이 될 만한 소식이 있었다. 지난달 27일 이 영화의 주역을 맡은 여배우 메릴 스트립이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별 관심을 끌지 못한 채 곧 막을 내릴 처지다.

결기와 행동력 없는 우파

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찾기 어려웠다. 집 근처 영화관에서는 상영을 안 해 지하철을 타고 멀리 가야 했다. 객석은 많이 비어 있었으나 영화 내용은 탄탄했다. 대처 총리가 정치인으로서 대중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국가 운영의 원칙을 지키며 영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주인공 메릴 스트립의 연기와 분장도 볼만했다. 여야가 온통 복지 공약에 매몰돼 있는 우리 현실에서 우파 단체나 인사들이 ‘철의 여인’ 관람하기 캠페인이라도 벌여봄 직한데 그대로 묻혀 버리는 것이 아쉬웠다.

지난주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어머니’의 언론 시사회에는 작가 공지영 씨가 참석했다. 이 영화는 국내 좌파를 상징하는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씨를 다룬 작품이다. 공 씨는 이 영화와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시사회 장소에 나타났다. 이 영화는 극장 개봉이 어려웠으나 좌파 진영은 개봉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하고 15개의 개봉관을 확보했다. 좌파 예술가들은 하나의 목표 아래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이지만 우파에겐 이런 투쟁심을 찾기 어렵다.

4월 총선에 출마하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 활동을 할 때 처음 만나 줄곧 동행했던 사람이다. 문 후보의 자서전인 ‘운명’에는 문화예술계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구절이 나온다. ‘2002년 대선에서 노 후보는 문화예술계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문화예술계 내부의 지지에 그치지 않고 그 지지가 일반 국민에게까지 확산되도록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선의 일등공신이 문화예술인들이라고 할 만했다.’ 좌파 성향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문화계를 쥐고 있으며 이들이 일반 유권자에게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계에서 좌파의 세력 확대는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젊은 세대의 좌파 성향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1970, 80년대 운동권 세력은 출판 분야에 대거 진출했다. 좌파 이념을 다룬 사회과학 서적을 집중적으로 내놓으면서 장기적으로 이념 지형을 바꿔 나가는 전략이었다. 1980년대 민중예술 운동을 통해 이들은 문화예술계 내부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정권의 지원을 업고 주류로 떠올랐다. 하지만 문화계에서 우파 쪽의 상황 반전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가치 지키는 헌신을

교육계에도 좌파 성향이 두드러진다. 국내 대표적인 좌파 단체로 꼽히는 전교조가 결성된 해가 1987년, 합법화된 때가 1999년이다. 교육계에 20년 이상 강력한 단체로 활동했다. 전교조에 맞서온 ‘투사’로 알려진 조전혁 국회의원은 “교육계에도 우파가 별로 없다”고 증언한다. 그는 “교사 중에서 우파에 대한 철학이나 가치관을 잘 이해하는 선생님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교육과 문화예술은 사람의 의식을 좌우한다. 우파의 공백 속에서 좌파 교육과 문화예술의 세례를 받은 젊은 세대가 늘어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968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생시위인 ‘68혁명’ 때 학생들과 노동단체는 파리의 거리를 폐허로 만들었다. 샤를 드골 대통령은 퇴진 위기에 몰린다. 하지만 그는 라디오 연설에 나와 “저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끝까지 행사할 것입니다.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투표 이외에 다른 방법을 취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라며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이 연설이 있은 뒤 파리 중심가에는 시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위대한 프랑스가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우국충정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들이었다.

드넓은 샹젤리제 거리가 가득 메워졌다. 경찰은 100만 명이 넘는 인파라고 추산했다. 앙드레 말로, 프랑수아 모리아크 같은 우파 인사들이 대열의 선두에 섰다. 이들은 외쳤다. “드골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간다.” 학생과 노조 인사들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프랑스는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

한국 우파에게 이런 결기와 행동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2008년 촛불시위 때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뒤 북악산에 올라가 ‘아침이슬’을 불렀다고 한다. 우파의 단점은 대한민국을 지탱해온 가치와 체제를 지키려는 정신과 신념, 철저함의 부족이다. 우파는 좌파의 꼼수를 나무라기에 앞서 스스로의 원칙과 가치를 지키고 확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